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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클래식이 지루한 초심자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4호 07면

“그쪽에 있는 연필을 저에게 주시겠어요?”
“연필이 뭐죠?”
193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 정신과 의사 테오필 알라주아닌의 방에 한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환자는 실어증을 증상으로 하는 일종의 치매를 앓고 있었죠. 언어와 개념을 연결하지 못하고, 건망증으로 고생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남들은 못하는 일에서 그는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바로 ‘창조’입니다. 그는 깜짝 놀랄 음악을 쏟아냈습니다. 쉰 살을 넘긴 이 환자는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입니다.

김호정 기자의 클래식 상담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라벨의 ‘볼레로’를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작은 북 연주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곡이죠. 8분음표(♪)와 16분음표(♬)로만 이뤄진 리듬이 15분 동안 170번 넘게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들이 계속 합류하면서 음악의 규모가 커지고, 소리의 빛깔도 다양하게 바뀌죠. 흥행 불패의 작품입니다. 이 음악이 연주될 때마다 청중은 열광하죠.

대부분의 클래식 초심자가 ‘지루하다’고 하는 음악과 비교해 볼까요? 고전 시대(18~19세기)의 음악에서는 주제 선율, 즉 멜로디의 반복이 중요했습니다. 현대처럼 녹음 기술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작곡 후 첫 연주에서 청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했죠. 그래서 주제 선율을 곡 중간쯤에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현대 청중에게는 지루한 작곡 기법이죠. 수백 년 전 작곡돼 몇 번씩 들었던 작품인데 지금도 멜로디는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청중이 ‘클래식은 지루하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볼레로’는 다릅니다. 멜로디 대신 리듬을 반복해 현대 청중을 유혹하죠. 어디에서부터 잘라 들어도 똑같은 ‘분절성’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고, 1초보다 작은 단위에서 결정되는 정확함은 기술ㆍ기계에 익숙한 이들에게 어필합니다. 이처럼 기존의 기법과 다른 음악을 만들어 내는 데는 라벨의 치매가 한몫했습니다. 강박적인 반복은 그의 뇌가 ‘정상’이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죠.

라벨의 현대성을 원더걸스의 ‘Nobody’ ‘So Hot’과 비교해 볼까요? 악보를 볼 줄 안다면, 이 두 유행곡의 리듬을 살펴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볼레로’와 같이 8분음표와 16분음표만 가지고 만든 리듬이 음악 내내 반복되죠. 리듬으로 승부한 음악이 현대 청중의 마음에 쏙 들어온 경우입니다.

라벨과 원더걸스의 공통점을 맞추다 보니, 질문에 답이 나오네요. 클래식 음악 중에도 ‘노바디’처럼 현대 청중을 ‘혹’하게 만들 작품이 있습니다. 겨울철 이가 딱딱 부딪치는 모양으로 음표를 그려 ‘사계’ 중 ‘겨울’을 표현한 비발디, 벌이 윙윙 날아다니는 소리를 건반에 옮겨 본 림스키 코르사코프 등은 이미지 시대 청중의 마음을 미리 읽었던 것만 같네요.

A:라벨의 볼레로 들어보세요


중앙일보 문화부의 클래식·국악 담당 기자. 사흘에 한 번꼴로 공연장을 다니며, 클래식 음악에 대한 모든 질문이 무식하거나 창피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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