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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국수를 찾아서 ③ 경기도 연천 ‘망향비빔국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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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비빔국수 본점인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 식당에서 한정숙씨(73·右)가 며느리 엄정자씨와 20인분 국수를 비비고 있다. [조용철 기자]

남자들의 악몽 중 최고봉은 ‘군에 다시 입대하는 꿈’이다. 그만큼 군생활이란 ‘대한민국 사나이 인생’의 가장 큰 고비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미 제대한 지 수십 년이 된 예비역 장병들을 부대 앞으로 불러모으는 국숫집이 있다.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 육군 5사단 신병교육대 앞에 있는 ‘망향비빔국수’다. 하사관 교육대부터 지금의 5사단까지 부대가 8번 바뀐 40년 동안 그 자리에서 국수를 비벼내는 집이다. 연천·전곡 일대의 장병들이 주 고객인 터라 ‘군대국수’라고도 불린다. 주말이면 이 일대에서 군생활을 한 초로의 예비역 장병부터 청장년층까지 원정 외식을 오기도 한다. 이 때문에 붐비는 주말엔 4000원짜리 국수를 3000그릇까지 팔기도 한다. 동두천에서 아들과 함께 왔다는 최영민(54)씨는 “외박이라도 나가는 날이면 제일 먼저 달려온 데가 이곳이었다”며 “그때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자꾸만 오게 된다”고 말했다.

이 집 비빔국수의 특징은 세 가지가 꼽힌다. ▶굵고 통통하면서 쫄깃한 면발 ▶새콤·달콤·매콤한 비빔국수의 3박자에다 탄산수처럼 쨍한 맛의 어울어짐 ▶만 국수에 비해선 국물이 적고, 비빔국수라기엔 국물이 많다는 것이다. 이 집을 찾는 장병들은 그중에서도 ‘쨍한’ 국물맛을 으뜸으로 친다. 이 국물의 비법은 ‘야채수’라고 불리는 채소발효수에서 나온다. 이 집 주인인 한정숙(73)씨가 들려준 야채수의 탄생 비화는 이랬다.

“이 근처가 겨울이면 눈이 많아서 채소를 먹을 수 없으니, 가을에 무·오이·고추를 항아리에 넣고 숙성시켰다 먹었지. 우리집 아저씨가 국수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넣어서 비벼 먹었는데, 이 야채수를 넣으니까 맛이 기가 막힌 거야. 옛날에 부대 앞에서 망향상회라는 점방을 했는데, 여름 되니까 마침 군인들이 ‘국수를 내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야채수를 넣고 비빔국수를 해줬더니 엄청 좋아하더라고. 그러다 보니 나는 김치를 맛있게 담그고, 아저씨는 야채수를 만들고 해서 아예 국숫집을 내게 된 거지.”

그러다 요즘에는 10여 가지 채소를 고온에서 10~15일 숙성시킨 다음, 건더기를 건져내고 저온창고에서 6개월~1년 이상 다시 발효시켜 아예 전문적으로 야채수를 만든다. 오랫동안 숙성시키기 때문에 국물이 진하고 걸쭉하다. 이 국물 맛은 뭉뚱그려 말하면 탄산수 같고, 말을 좀 보태자면 코끝을 톡 쏘는 매콤한 맛에 새콤·달콤한 맛이 가미돼 있다. 매콤한 맛은 청양고추, 시원한 맛은 오이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 집은 많은 일화도 가지고 있다. 1970년대엔 ‘봉급국수’라고 불렸다. 한씨는 “군인들이 봉급날이면 우리 집에 국수를 주문했는데, 중대별로 날을 돌아가며 시켰다”며 “그러면 120~130인분을 큰 ‘다라이’에 무쳐 머리에 이고 양손에 지고 부대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80년대 중반 20사단 신병교육대 시절엔 국수 가격을 800원에서 1000원으로 올렸다. 그러자 사단에서 직접 찾아와 “배고픈 훈련병들이 국수 한 그릇 먹겠다는데 1000원을 받아서야 되겠느냐”며 “가격을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에 군인한테는 옛날 가격으로 받고, 민간인한테는 제 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씨는 고객인 군인들에게 어머니로 통한다.

“군인들이 돈이 어디 있겠어. 그래서 밥도 많이 해주고, 훈련 갔다 오면 막걸리도 넣어주고 했지. 그랬더니 요즘 집까지 찾아와서 그때 너무 고마웠다며 막 우는 사람도 있어요. 몇 해 전에는 누가 노래방 기계를 보냈더라고.”

망향국수는 또 ‘양이 많은 국수’로도 유명하다. 고객이 주로 배고픈 장병들이었기 때문에 그저 양을 많이 줬다. 지금은 보통과 곱빼기 두 종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왕 곱빼기’와 ‘왕의왕 곱빼기’ 메뉴가 있었다. 보통 4000원, 곱빼기 5000원이다. 망향국수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건 5사단 수색대가 있었던 90년대 이후 마이카 시대가 되면서부터다. 그러다 최근엔 3남매가 각각 연천 본점과 양주·양수리 분점을 내고 모두 망향국수를 판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한테 20여 곳의 프랜차이즈도 내줬다. ‘군대국수’가 이젠 ‘민간’으로 진군하고 있다.

글=김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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