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22. 지도자가 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 한국농구 발전에 기여한 이병희 전 대한농구협회장. 이 전 회장은 1964년 11월부터 80년 9월까지 16년간 농구협회장을 지냈다.

1968년 들어 여자 농구팀에서 코치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잇따라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남자농구보다 여자농구가 훨씬 인기 있었고, 지도자에 대한 대우도 좋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기업은행 측은 나를 농구팀 코치로 발령을 냈다.

이 무렵 국내 농구 수준은 미8군에서 근무하던 마콘과 고스폴이 번갈아 한국 대표팀을 지도한 덕분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김영일. 이인표. 김무현.신동파 등을 주축으로 한 대표팀은 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일본.대만.필리핀을 따돌리고 이스라엘.태국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이듬해 도쿄 유니버시아드에선 브라질.벨기에.필리핀 등을 뿌리치고 2위에 올라 아시아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기업은행 코치로 농구 코트에 복귀해보니 선수가 여덟명뿐이었다. 그 중 신동파.김무현.곽현채 등 멕시코 올림픽에 차출된 선수들을 빼고나니 다섯명 채우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선수가 모자라면 나도 뛰겠다"는 각오로 나머지 선수들을 조련하기 시작했다. 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한국은 14위를 차지했다.

69년 여름 아시아농구선수권(ABC)대회를 앞두고 농구협회는 나를 대표팀 부코치로 선임했다. 그런데 공군 시절 은사였던 이상훈 대표팀 코치가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는 바람에 내가 대표팀 정코치가 됐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지 3년 밖에 안 된 신출내기 지도자가 외람되게 국가대표팀 코치가 된 것이다.

당시 협회의 목표는 우승이었다. 5.16 주체세력의 일원으로서 국회의원을 겸하고 있던 이병희 농구협회장은 틈만 나면 대표팀 훈련장에 나타나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테니 꼭 아시아 정상을 점령하라"고 독려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군복무 시절 축구경기를 하다가 하프타임 때 피운 담배 맛을 잊을 수 없다"며 훈련하는 선수들에게 양담배를 한 개비씩 권했다. 예나 지금이나 선수가 훈련 중에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스포츠의 생리를 잘 모르는 그는 선수들이 사양하자 "정신자세가 됐다"고 칭찬하고는 "이번엔 틀림없이 우승할 것"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팀 코치가 된 나는 농구계의 지나친 기대로 큰 부담을 느껴 잠을 설쳤다. "명선수 출신이 반드시 명지도자가 되란 법은 없다"는 어느 신문기사도 내 심기를 건드렸다.

나는 은근히 오기가 나 '사나이로서 한번 해보자'는 야망에 불탔다. 나는 훈련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선수들을 소집해 우선 "베스트5가 따로 없다"고 선언했다. 당시 대부분의 팀에선 주전 선수들이 거의 풀타임으로 뛰었고, 나머지 선수들은 주전이 5반칙으로 퇴장하거나 부상을 당할 경우에만 기용되는 것이 예사였다. 작전도 주전 선수 중심으로 짜여졌다.

나는 선수들의 평소 연습 태도를 일일이 체크했다. 특히 선수들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각종 자료를 만들었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선수를 기용할 것임을 밝혔다. 가능하면 다양한 전술.전략으로 선수들을 고루 기용했고, '12명 모두 주전'이라는 의식을 선수들에게 심어줬다. 출신 학교도, 소속팀도 내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 기용 원칙은 오직 선수의 기량이었다.

전.후반 총 40분의 격렬한 경기를 치르려면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주전 다섯명만으론 부족했다. 그해 여름 선수들과 함께 땀 흘리며 아시아 정상 정복의 꿈을 키웠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