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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올드보이 “서두르지 않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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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16면

이동국이 3월 15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대구FC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와 조별리그 2차전. 한국이 0-5로 패한 암흑 같은 경기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이동국이었다. 후반 32분 교체된 19세 소년은 거침없이 그라운드를 누비고 겁 없이 중거리 슛을 쏘았다. 싱그러웠다. 그 기억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동국을 실제 나이보다 어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동국(전북 현대)은 이제 서른 살이다.

이동국, 6년 만의 해트트릭

2000년대 중반까지 이동국은 이회택-차범근-최순호-황선홍으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을 차세대 선두 주자였다. 프랑스 월드컵 이후 그는 ‘심바’라고 불렸다. 당시 인기를 모은 애니메이션 ‘라이언킹’의 아기 사자 이름이다. 얼마 후에는 ‘라이언킹’이 그의 별명이 됐다. 별명엔 축구 팬들의 염원과 기대가 담겼다. 그는 한동안 대표팀의 에이스였다.

하지만 이동국은 ‘사자왕’이 되지 못했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는 ‘실패한 스타’의 대명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2007년 잉글랜드 미들즈브러에 진출했지만 1년 반 동안 한 골도 못 넣고 벤치를 지켰다. 성남으로 복귀한 뒤에도 13경기에서 2골밖에 넣지 못했다. 그중 하나는 페널티킥이었다. 이동국을 영입한 김학범 성남 감독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임 신태용 성남 감독은 이동국을 내쳤다. 이동국은 다른 구단을 물색했지만 그에게 호감을 보인 구단은 많지 않았다. 최강희 전북 감독이 이동국을 영입하자 적지 않은 축구인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정환

그런데 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올드 보이’ 이동국이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다. 2일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가 한 경기 세 골을 넣은 건 2003년 이후 6년 만이다. 이동국은 돌아왔는가?
 
고비 앞에서 번번이 무릎을 꿇다
이동국에겐 몇 차례 기회가 있었다.

2000년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득점왕에 오른 뒤 2001년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에 입단했다. 그러나 자리를 못 잡고 6개월 만에 친정 팀 포항으로 돌아왔다.

이동국은 프랑스 월드컵 이후 줄곧 대표팀의 넘버 원 옵션이었지만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명에서 그를 제외했다. 베스트 11은커녕 벤치에도 앉지 못한 것이다. 대신 히딩크 감독은 발 빠르고 투지 하나는 끝내 주는 차두리를 뽑아 ‘조커’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이동국 없는 대표팀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히딩크는 4강 신화를 썼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는 아드보카트 감독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대회 개막을 두 달가량 앞두고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누구에게 차여서 다친 게 아니라 혼자 공을 몰고 넘어가다 쓰러졌다. 의욕 과잉이 문제였다. 빠르게 역습하기 위해 무게중심을 급히 옮기다 치명상을 입었다. 독일 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그는 독일에서 재활 훈련을 했다.

2007년 초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지만 결과는 앞에 쓴 것처럼 실패로 끝났다.

이동국은 어슬렁거린다
이동국은 1m85㎝의 장신이면서도 몸이 아주 유연하다. 골대 구석을 파고드는 골 결정력도 겸비했다. 문전에서 그는 우직하면서도 정교했다. 우리가 이동국에게 환호했던 이유다. 하지만 ‘이동국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면 속이 터진다’ ‘도무지 수비는 신경을 안 쓴다’는 팬들의 원색적인 비판 혹은 비난도 받았다.

한국의 학원 축구 풍토에서는 단기 대회 우승이 지상과제다. 기본기보다는 이기는 법부터 가르친다. 이동국 같은 걸출한 공격수는 대개 감독에게서 “넌 딴 건 신경 쓰지 말고 골만 넣으면 된다”는 주문을 듣고 자라기 일쑤다. 학원 축구에서 괴물로 통했던 FC 서울의 정조국도 “프로에 와 수비하는 법을 배우느라 힘들었다”고 말했다.
“골을 넣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힘을 비축해 둬야 한다”는 논리는 고교 축구에선 통할지 몰라도 세계 정상급 무대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동국이 히딩크에게 외면받고, 독일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팀에 녹아 들지 못한 것은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다.

축구인은 한결같이 “이동국이 한참 기량이 발전해야 할 시기에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축구계 원로들은 “이동국·고종수·안정환이 축구보다는 어울려 다니며 노는 데 더 신경을 쓴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2000년 초반 박지성은 이들의 발 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사자, 긍정의 힘을 배우다
이동국은 2002년 월드컵을 한 경기도 보지 않았다. 이동국은 “처음 겪은 시련이었다. 다행히 광주 상무가 나에게 돌파구가 됐다”고 회고했다. 숨어 지냈던 2002년과 반대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이동국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선수단을 찾아가 응원하고 격려했다. 이동국은 “힘들었지만 그 상황을 즐겼다. 월드컵에 출전했다면 나에게 더 나쁜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했다”고 말했다.

벤치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던 잉글랜드 시절에 대해서도 “축구 선수 중 프리미어리그에 간 선수는 아주 극소수다. 내가 거기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좋다. 은퇴 후 일부러 지도자 연수도 오는데, 나는 그 시스템 안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내가 못한 거야 누굴 원망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마지막 한 고비를 넘어가는 독기는 부족하지만 이동국에게는 깊은 시련을 이겨내는 ‘긍정의 힘’이 있다. 그는 성남에서 보낸 힘겨웠던 지난 시즌에 대해서도 “기록은 좋지 않지만 플레이만 놓고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성남은 모따와 두두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팀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은 팀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광주 상무에서 재기하고, 2006년 무릎 인대 파열 부상을 이겨낸 것처럼 이동국은 이번에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고 있다.

최강희 감독은 “자신감 있는 모습이 맘에 들었다. 기량은 타고난 선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성남에서 이동국은 안정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마음 편하게 경기에 뛸 수 있도록 하면 반드시 잘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 이동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K-리그 초반 6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다. 한 경기 한 골꼴이다. 기록만 보면 당장 대표팀에 뽑아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축구는 육상이나 양궁 같은 개인 기록 경기가 아니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이미 세대 교체를 이뤘다. 지금 대표팀의 주축 공격수는 박지성과 이근호다. 박지성은 대표팀의 주장으로 팀을 리드하고 있다. 세대 교체의 흐름을 거슬러 가며 거물급 노장을 다시 발탁한다는 건 감독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동국은 19세 때 처음 대표팀에 뽑혔을 때보다 지금 다시 태극마크를 다는 게 훨씬 힘든 일이다.

최근 잇따라 골을 터뜨리고 있지만 이동국이 진정으로 부활했는지는 알 수 없다.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의 골은 반가운 일이지만 문전에서의 움직임이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고 말했다. 더 적극적으로 부지런히 움직여 줘야 한다는 의미다. 최강희 감독 역시 “더 열심히 수비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건 아니다”며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이동국은 “아직은 내가 대표팀에 대해 말할 단계는 아니다”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미련이 없을 리 없다. 이동국은 “황선홍 선배처럼 화려하게 은퇴하고 싶다. 지금 내 나이에 아직 은퇴를 말할 때는 아니지만 처음과 끝이 좋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황선홍의 축구 인생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섣불리 독일에 진출했다 실패도 경험했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수차례 결정적 기회를 놓치며 팬들로부터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비난을 받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마지막 평가전에서 중국 선수의 태클에 걸려 구경꾼 신세가 됐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선제골을 터뜨리며 4강 신화의 서막을 열었다.

2002년 황선홍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2010년 이동국은 서른하나다. 나이만 놓고 보면 이동국도 늦은 건 아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을 1년 가까이 앞둔 2001년 5월 황선홍은 대표팀 주전으로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활약했다. 그러므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과 대표팀을 향한 이동국의 도전은 이제 막 첫발을 떼었을 뿐이다. 이동국은 애써 여유를 보인다.

“앞으로 마흔까지 선수 생활을 할 겁니다. 2010년에 못 나가면 다음 월드컵에 나가면 되죠. 하하하.”

올드보이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는 잠시 르네상스를 맞았다. 대표팀 참패는 “한국 축구가 강해지려면 K-리그를 살려야 한다”는 캠페인성 열기를 낳았다. 이동국·안정환(33)·고종수(31)가 중흥의 삼두마차였다. 축구장에서 여학생의 비명이 아저씨들의 함성을 누르기도 했다.

안정환은 세 명 중 유일하게 2002·20 06년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후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골을 넣었다는 괘씸죄로 페루자(이탈리아 세리아A)에서 쫓겨났다. “팀에서는 대표팀에서처럼 열심히 안 뛴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곁들여졌다. 2006년 월드컵 후에는 팀을 찾지 못해 무적 신세가 됐다. 2007년 수원, 2008년 부산에서 뛰다가 지금은 중국 프로축구 다롄 스더에 몸담고 있다. 조건만 따지며 너무 자주 팀을 옮겨 기량이 만개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천재적인 왼발 미드필더로 각광받던 고종수는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뚜렷한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는 지난 2월 은퇴해 축구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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