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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말띠 여성, "팔자 드세다" 억울한 속설·선입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무인년. 호랑이해다.

12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규칙적인 띠의 순환이 뭐 별거냐 하겠지만 뿌리깊은 남아 (男兒) 선호 사상과 띠에 대한 속설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서 의미는 좀 다르다.

범띠 여아 (女兒)가 될 많은 태아들이 세상의 빛도 못 보고 사라지고 말테니. 어디 호랑이해뿐인가.

용.말의 해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경북.부산의 시민단체들은 범띠해를 맞아 딸사랑 운동을 벌이며, PC통신 천리안 여성학동호회는 우리 인구의 약 12.5%를 차지하는 범띠.용띠.말띠 여성들의 모임결성까지 추진 중일까. 어렵게 태어났다가 당한 고난 때문일 게다.

'기가 세다' '팔자가 드세다' '남자 앞길을 막는다' 는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말. 결혼적령기에 이르면 결혼을 늦게 하라는 둥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편감을 만나야 한다는 둥 갖은 수모를 다 겪게 마련이다.

특히 부모님이 보수적인 남자를 결혼상대자로 만날 경우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어느 용띠 여성의 사연 - “남녀공학 대학에 다녔는데 남학생보다 여학생들이 성적도 좋고 활동도 활발히 하는 편이었어요. 그런 걸 두고 교수님들은 여자들이 용띠라 남자들이 기를 못 펴고 산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셨죠.” 용띠 회사원의 말 -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무조건 결혼을 늦게 해야 잘 산다는 말을 듣곤 했어요. 결혼을 일찍 하면 결혼을 두번 하거나 평탄치 않은 삶을 살게 된다나요. 그런 말 때문인지 동갑내기 여자친구들 중에서 일찍 결혼한 애들이 거의 없어요.” 세칭 백말띠 여성의 얘기 - “어릴 적부터 너는 백말띠니까 고집 부리지 말고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커서도 뜻한 일이 안 이뤄지면 주위 사람들은 애꿎은 띠 탓을 하더라고요.” 신세대 여성도 띠의 굴레에선 자유롭지 않다.

“올해는 백호띠라 호랑이띠 여자들은 결혼하면 안 좋대요. 그래서 친구들도 웬만하면 올해엔 결혼 안하려고들 하더라고요.” 어린 시절 가족들로부터 '범띠 가시내' 로 불렸다는 김모 (25.대학원생) 씨의 말이다.

같은 띠를 타고난 남자들은 '사주가 좋다' '큰 일을 해서 이름을 떨칠 팔자' 로 회자되는 건 또 뭔지. '억울' 이라는 단어를 들이대야 할 뿐이다.

그런데 여자 팔자가 진짜로 띠와 상관이 있는 걸까. “사주는 생년월일시를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띠만 가지고 팔자가 세다, 아니다를 운운할 수 없다” 는 것이 역술인 백운산씨의 말. 또한 과거와 달리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한 지금 '기가 세다' 는 말은 '활동 범위가 넓다' '남자를 잘 리드한다' 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범띠여성 중엔 사회사업가.정치가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는 이가 많고 말띠는 연예.예술인, 용띠는 의사.법조인 등이 많다고. 아직도 '범띠 딸은 안돼'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범띠 딸 낳고 싶은 새댁' 이 하이텔에 올린 이 글을 한번 읽어 볼 것. “범띠해라 딸을 낳지 않겠다니 정말 새삼스러운 반응이군요. (…) 저와 똑같은 여아를 낳아서 보란 듯이 당당하게 키우고 싶어요. 더구나 범띠해라면 더욱 씩씩한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까. (…) 여성 여러분! 범띠해에 딸을 낳읍시다.

그리고 이 땅의 딸로 태어나 제 몫을 하는 당당하고 씩씩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잘 키워봅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당당한 어머니와 씩씩한 딸아이를 저의 동지로서, 그리고 우리 딸아이의 친구로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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