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고충처리인 리포트

영부인은 대통령 부인에게만 쓰는 호칭 아니지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0면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를 왜 ‘전 영부인’이라고 하지 않나요.”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요즘 독자들로부터 종종 받는 질문이다. 어쩌다가 검찰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됐지만 그래도 전직 대통령의 부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과거의 관례대로 영부인이란 호칭을 사용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권양숙·이희호·손명순·프란체스카·김윤옥·김옥숙·육영수·이순자 여사 사진을 합성한 것.

한 독자는 “영부인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은 권 여사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뜻을 잘못 알고 있는 말 중 하나가 영부인(令夫人)이다. ‘대통령 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한다. 심지어 한자로 ‘領夫人’으로 쓴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영부인은 대통령 부인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국어사전엔 ‘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경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옆집 아주머니나 회사 상사 부인 등 기혼 여성이면 누구에게나 영부인이란 호칭을 쓸 수 있다. ‘영(令)’은 예의를 갖춰 남의 가족을 부를 때 붙이는 접두사로 옛날에는 남의 아내의 높임말로 ‘영실(令室)’ ‘합부인(閤夫人)’ 등도 함께 썼는데, 모두 사라지고 영부인만 남았다. 그런데 그 뜻이 왜곡되고 잘못 사용됐던 것이다. 중앙일보는 대통령 부인을 ‘○○○여사’라고 쓰기로 자체 표기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간혹 영부인이란 표현이 없지는 않지만 이는 언어의 용법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실수 때문이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영부인이 대통령의 부인만을 뜻하는 호칭으로 ‘승격’된 것은 3공화국 시절이었다. 당시 영부인뿐 아니라 대통령은 ‘각하’로, 대통령의 아들은 ‘영식’, 딸은 ‘영애’로 각각 불렸다. 각하란 말 역시 고위 관직이면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존칭이고, 영식과 영애도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지만 권위주의 정권은 아무에게나 쓰지 못하게 했다. 이들 호칭을 다른 사람에게 썼다간 일종의 괘씸죄에 걸려들었다. 권위주의 시대에 호칭이 어떻게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각하와 영식·영애란 용어는 권위주의 시대가 청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됐지만 영부인만큼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아직도 정부의 홍보물엔 영부인이란 단어가 등장하고 있고, 일부 언론에선 ‘전직 영부인’ ‘전 영부인’처럼 어법에도 맞지 않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서울 일원동의 임동초씨는 “오랜 세월 동안 영부인을 대통령 부인한테만 쓰다 보니 일반의 언어습관처럼 굳어버렸다”며 “이런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를 언론이 앞장서서 털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영부인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호칭이 또 하나 있다. 조선 말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를 뜻하는 ‘민비’가 그것이다. 민비란 민씨 성을 가진 왕비란 말로 일반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왕비들 가운데 성씨를 쓰는 호칭은 명성황후가 유일하다. 아직도 일부 역사가들은 민비란 표현을 여전히 쓰고 있다. 문제는 민비가 왕비를 낮춰 부르거나 비하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대한제국 시대에 황후로 추존됐다. 명성황후란 호칭도 이때 붙여졌다. 다만 세간에선 민씨 일가의 세도정치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민비로 불렀을 가능성은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기피했던 일본도 그런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전개되면서 민비 대신 공식 호칭이 자리잡았다. 한 독자는 “조선의 왕비들 중 ‘이비’ ‘김비’로 불리는 사람이 있느냐. 명성황후의 공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호칭만큼은 공식적인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명수 고충처리인

◆고충처리인=한마디로 독자와 중앙일보를 잇는 다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명예훼손 등 언론 보도로 인한 피해예방과 자율적 구제를 위해 일하고, 독자를 대표해 신문 제작에 관한 의견을 전달하는 창구입니다. 중앙일보의 기사로 불편을 겪으셨거나 편집 방향 등에 의견 및 제보가 있으신 분은 연락을 주십시오. 고충처리인이 여러분의 입과 손발이 되겠습니다. 보내주신 의견 가운데 선정된 내용은 직접 답변해 드립니다. 전화 02-751-9000, 080-023-5002 팩스 02-751-5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