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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식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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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구기 종목 중 선수에게 가장 금욕(禁慾)을 요하는 것이 축구일 것이다. 엄격한 절제와 피나는 훈련은 모든 스포츠의 기본 덕목이지만 축구는 특히 그렇다. 골키퍼를 빼고 축구 선수가 전후반 90분 내내 뛰는 거리는 20㎞내외로 하프 마라톤에 해당하는 양이다. 더구나 공을 쫓아 전력 질주하기 때문에 운동량이 만만치 않다. 경기 중 흘린 땀으로 체중이 2,3㎏씩 빠지는 건 예사다. 그러니 알코올 한 입, 담배 연기 한 모금의 유혹에 빠지는 순간 축구선수로서의 생명은 끝장이다.

한 경기를 마치면 닷새 이상은 쉬어야 체력이 회복된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의 명문 클럽 선수들은 이런 호사를 누리기가 힘들다. 스페인의 축구 스타 라울은 "1년에 65경기 정도만 해도 좋겠는데 이보다 10게임은 더 뛰어야 하니 지치고 힘들다"고 호소한 적이 있다. 거액에 사들인 선수를 최대한 쥐어짜야 수익을 맞추는 구단이 이런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다. 최고급 선수들이 포진한 이탈리아의 세리에 A,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 등은 6,7월 두 달을 빼고는 매주 경기를 펼친다. 여기에 챔피언스리그.유럽축구연맹(UEFA)컵 대회가 매년 있고,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과 유럽선수권대회(유로대회)의 예선에도 출전해야 한다. 리그 소화하랴, 국가 대표로 뛰랴 혹사 당할 수밖에 없다.

지난 5일 폐막한 유로2004에서 스페인.잉글랜드.이탈리아.독일.프랑스 등 축구 강국들이 4강 문턱을 못 넘고 줄줄이 낙마했다. 앙리와 지단, 베컴과 오언 등 유명 선수들은 초반부터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리그를 마치고 곧장 투입돼 파김치가 된 것이다.

반면 스타 한명 없는 그리스는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우승컵을 낚아 새 역사를 썼다. 감독 오토 레하겔은 90분간 쉬지 않고 뛰라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전진, 후퇴하는 모습은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기조차 했다. 그리스의 위업은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처럼 축구 변방 국가들에 자극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유효 슈팅 하나가 결승골로 연결된 그리스식 수비형 축구에는 왠지 기계적인 무미건조함과 답답함이 있다. 펠레나 마라도나가 선사했던 호방하고 상상력 넘치는 축구가 그립다. 격자에 갇힌 듯한 이 재미없는 시대에, 축구마저 쩨쩨해지는가.

이영기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