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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업협정 파기 배경·파장…한국 환난틈타 일본 실속챙기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일본 정부가 22일 관계부처 장관회의에서 사실상 어업협정의 파기를 결정함으로써 양국관계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다.

협정 파기는 그동안 일본이 한국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계속 압박해온 카드다.

그러나 카드수준을 넘어 파기를 확정함으로써 최근 한국의 경제위기에 대한 일본의 지원과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의 전향적인 대일자세 표명 등으로 호전기미를 보이던 양국관계는 급전직하로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한국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여타 문제에 신경쓸 경황이 없는 틈을 타 일본이 실속을 챙기기 위해 협정파기라는 최후의 카드까지 불사했다는 비난이 일 경우 한국민의 반일감정도 크게 확산될 수 있다.

이미 한국에서는 일본이 마음대로 설정한 직선기선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지난 20일 동해에서 조업중이던 한국의 '제3 만구호' 를 나포한데 대해 정부가 외교루트를 통해 항의를 표시하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이처럼 양국관계가 악화될 경우 일본측이 기대하는 현 협정의 효력유지기간인 1년내에 재협상을 마무리한다는 계획도 제대로 이뤄진다는 보장이 없다.

자칫하면 무협정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 위험성도 있다.

일본에서도 수산업계와 자민당내 수산업 관련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부측의 결정을 환영하는 목소리와 함께 양국관계 악화 등 앞으로 닥칠 사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한국측의 반발로 재협상이 이뤄지지 않아 무협정 상태가 될 경우 양국간의 나포경쟁이 벌어지는 등 동해 어장이 일시에 혼란상태로 빠져들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일본이 이같은 점을 잘 알면서도 한.일 어업협정 일방파기라는 초강수를 둔 배경에는 국내정치적 측면이 강하게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가 金당선자의 파기 유보 요청까지 정면으로 거부한 것은 자신이 사임압력을 받을 만큼 정치적 궁지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총리는 그동안 재정개혁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소비세율 인상과 금융개혁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심각한 경기후퇴가 초래되면서 하시모토총리는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뒤늦게 소득세 특별감면 등 경기부양대책을 내놓았으나 정권 지지도는 40%이하로 곤두박질쳐버렸다.

어업협정 파기가 내치 (內治) 실패를 강경외교를 통해 돌파하려는 정치적 포석이라는 해석도 이런 배경에서 나오고 있다.

일본의 어민 비율은 전체 국민중 2%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4면이 바다여서 전체 국회의원중 절반 이상이 지역구에 바다를 끼고 있다.

참의원 선거 (7월) 를 앞두고 자민당이 홋카이도 (北海道) 출신의 사토 교코 (佐藤孝行) 전총무청장관을 내세워 지난해 10월부터 협정파기를 줄기차게 요구한 것도 어민 표를 의식한 때문이다.

중립적 입장을 유지해온 하시모토총리는 시마무라 요시노부 (島村宜伸) 농수산상이 일방 파기를 주장하며 사임의 배수진을 치자 결단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협상 결렬 책임을 지고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외상까지 사임할 경우 하시모토정권의 붕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협정파기로 시간을 번 뒤 한국과 유리한 입장에서 교섭을 하자는 속셈이다.

"양국이 냉정하게 교섭에 임할 경우 1년안에 새로운 협정 체결은 가능하다" 는 일 외무성의 코멘트가 이를 말해준다.

외무성 관계자는 "김영삼 (金泳三) 정부 아래서는 협상을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게 문제" 라며 "협정을 파기한 뒤 새정부와 협상을 벌이는 게 효과적" 이라고 주장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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