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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길을 가며, 왜 권력을 곁눈질하는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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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10면

1. 유학은 언필칭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외친다. 학문을 닦아 정치를 한다는 뜻에서 선비들을 사대부(士大夫)라 부른다. 그러나 선비들이 다 정치에 나섰던 것은 아니고, 또 그것을 권장했던 것도 아니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선비들의 오랜 딜레마, 修身이냐 立身이냐

조선 선비들의 콤플렉스가 여기 있다. 가족이나 마을의 기대는 이른바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있었다. 어사화를 꽂고 삼 일을 가두행진에 잔치를 벌인 후 술판에 토해 내는 신입식을 거친 다음, 그는 권력과 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것, 그것이 모든 가문의 공통된 소망이었다. 그 도도한 흐름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이 책에서 배운 것은 “진정 인간이 되라는 것”이었다. 책은 인격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라고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기술로 관직을 사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갈등은 오래되었다. 공자 자신이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젊은이들이 새 통치자의 유능한 기술자가 되기 위해 내 문하로 모여들고 있다.”
그 현실이 공자로 하여금 학문을 둘로 구분하게 했다. 하나는 ‘성숙을 위한 공부(爲己之學)’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인정을 겨냥한 공부(爲人之學)’이다. 유학은 이 학문의 분열 위에 세워져 있다.

2. 이른바 인성교육과 입시학원 사이의 갈등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귀족제를 떠나 관료제를 선택하는 순간 이 곤혹은 피할 수 없다. 조선의 교육기관들은 관학, 즉 입시를 위한 학원으로 출발했다. 서원이 생긴 것은 이 황폐를 딛고 진정한 인간을 기르자는 도학(道學) 캐치프레이즈의 결과였다.

그러나 성공할 수 있었을까. 퇴계가 백운동서원에 사액을 받고, 그 자신 도산에 서당을 열었지만, 찾아오는 학도들의 관심은 과거시험 준비에 있었다. “어째 다들 과문(科文)을 익히려고 찾아오는 애들뿐이냐.”

『퇴계집』 한 구석에는 이런 탄식이 적혀 있다. “학부형들은 내가 『심경』이나 『근사록』같은 수양서들을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퇴계의 서당이 붐빈 것은 그의 고결한 인품이나 높은 관직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당대 최고의 국가고시 학습교사, 혹은 멘토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3. 책이 가르치는 대로 살겠다는 선비들은 당연히 이 ‘꼭두각시’ 놀음에 끼지 않으려 했다. 퇴계는 오랫동안 관직을 방황(?)하다가 만년에야 비로소 도산에 정착,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65세에 읊은 ‘도산십이곡’에는 이런 노래가 실려 있다.

“당시(當時)에 다니던 길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 가 헤매다가 이제야 돌아온고/ 이제야 돌아왔으니 다른 곳 마음 말리라.”
퇴계와 동갑으로 영남의 좌우를 갈랐던 남명 조식은 퇴계의 늦은 귀향을 축하하지 않았다. “만은(晩隱)이라니, ‘늦게사 돌아왔다’고? 타락한 정치 속에서 누릴 것 다 누리다가, 이제 슬그머니 기어 들어와 현자의 흉내를 낸단 말이냐.”
남명은 평생을 과거시험과 담을 쌓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지리산 아래, 하늘 아래 가장 웅장한 곳에서, 천하가 격동시켜도 함부로 나서지 않겠다던 사람이라, 비평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4. 퇴계는 부끄러웠다. 그는 자신의 정치 참여를 ‘어리석은’ 방황이었다고 고백했다. 23세의 젊은 수재 율곡에게 그는 자신의 전철을 밟지 말고 ‘진정한 학문’에 몰두하라고 권했다. “옛적부터 ‘이 학문’을 두고 사람들은 놀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익과 권력을 노리고 경전을 파고들면 길은 더욱 멀어진다!”

퇴계의 이 같은 토로는 저간의 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기억해야 할 것은 도학, 혹은 한마디로 학문(學問)이라 불리는, ‘자신을 위한 공부(爲己之學)’는 조선 유학의 전통에서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퇴계는 나중에 율곡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안타깝게도 재주 있는 자들이 이 학문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도도한 물결은 과거시험과 출세를 향해 가고 있다. 가끔 이 ‘세속의 트렌드’(流俗)를 벗어난 사람도 있지만, ‘이 학문’을 감당할 재주가 아니거나, 또 혹은 자각이 너무 늦어 이미 백발이다. 그대는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주로 우뚝 ‘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후일의 성취를 헤아릴 수 없겠다. 바라건대 오직 천만 번 원대(遠大)하기를 기약할 일이지, 작은 성취(小得)에 자족하지 마시라.”

율곡은 그러나 적극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19세에 금강산을 내려온 이후 내리 장원을 먹어 “아홉 번 장원하신 분(九度壯元公)”으로 불린다. 그는 ‘과거시험이 자신을 팔아먹는 행위’라고 하면서도 그 길을 갔다. 친구들에게 그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구구히 자신을 변명해야 했다.

5. 율곡은 근본적 콤플렉스에 시달리면서도 통합을 모색한다. 그는 두 가지를 제안했는데 하나는 관료 선발에 있어 과거제(科擧制)보다 일찍이 조광조가 실험했던 천거제(薦擧制) 도입을 제안했다. 물론 파벌과 공정성 등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지만, 율곡은 선발자의 식견과 비전을 담보하면 실패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역시 유학의 커리큘럼에 철저해야 한다!

둘째는 지식의 분열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다. 그는 ‘교과서’가 단순한 암기와 답안 작성 이상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격몽요결』 마지막에 그는 이런 해법을 적어 두었다.

“옛적에는 농사를 짓고 등짐을 지며 부모를 봉양하면서도 행유여력(行有餘力)으로 학문을 하여 덕을 쌓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일 않고 과거 공부 하나 하라는 데도 엄살이다. 과거가 이학(理學)과 다르다 해도 독서(讀書)·작문(作文)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둘은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과거 공부 하라면 ‘나는 도학에 뜻이 있다’면서 잘난 척하고, 이학을 독려하면 ‘과거 공부가 걸려 못 하겠다’고 뒤로 빼니,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하고 늙어 후회를 한다.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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