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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저자 후쿠야마 교수에게 듣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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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경제위기에 대한 국제통화기금 (IMF) 의 처방은 우리의 기존 문화.정서.사회제도와 부닥치는 점이 많다.

IMF의 권고는 중요한 경제변수 몇 개에 손을 대라는 정도가 아니라 정부.기업.근로자 모두에게 과거와 절연하고 글로벌 경제 시대에 맞은 새로운 사고와 행태를 갖추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소련.동유럽의 몰락과 함께 냉전시대가 끝나고 다들 글로벌 경제 시대가 왔다고 할 때 미국의 저명한 사회비평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지난 95년 펴낸 베스트셀러 '신뢰 (Trust)' 라는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 사회의 문화적 기반과 경제적 성취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새로운 글로벌 경제 시대에는 각 구성원간의 '높은 신뢰' 를 구축한 사회만이 유연한 대기업 조직을 일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미국.서유럽은 신뢰도가 높은 사회인 반면 한국.중국 등은 신뢰도가 낮은 사회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현재 아시아 위기의 본질을 '신뢰의 위기' 로 규정하고 있는 지금 후쿠야마는 아시아.한국의 위기를 어떻게 진단하고 전망하고 있을까.

워싱턴 근교 조지 메이슨대의 공공정책학 교수로 재직중인 후쿠야마를 만났을 때 그는 새로운 저서 집필에 열중하고 있었다.

- 새 저서를 준비중인가.

"올 여름께 탈고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펴낼 생각이다."

- 제목은.

" '대혼란 (The Great Disturbance)' 이다.

" (그는 책의 내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기를 피했으나 언뜻 대공황 - The Great Depression - 을 연상시키는 제목으로 보아 최근의 아시아 위기 등이 주요 주제인 것같다. )

- 아시아 위기는 신뢰의 위기로 규정되고 있다.

당신은 일찍이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신뢰도가 낮은 사회' 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한국은 특히 일본.대만.홍콩 등과 비교할 때 신뢰도가 낮은 사회다.

사회의 중심계층과 근로자.학생.지역주민 등의 신뢰가 약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뢰도가 엷은 부분은 경영층과 근로자들의 관계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량해고와 실질임금의 감소를 가져 올 IMF의 처방은 위기를 더 격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한국 특유의 국가적 일체감이 강화되면서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나아가자는 의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 한국이 신뢰도가 낮은 사회가 된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가족' 중심의 조직행태 때문이라고 당신은 지적했는데, 그렇다면 기업 지배구조의 개혁 등을 요구한 IMF의 처방이 얼마나 그같은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보는가.

"가족 중심의 조직행태는 오랜 문화.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어찌 해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신뢰도가 낮은 사회가 하루아침에 신뢰도가 높은 사회로 바뀔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이번 위기는 '하늘로부터의 축복' 이 될 수 있다.

위기가 닥치지 않았으면 쉽지 않았을 변화를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수용하기 위해 나설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IMF의 처방은 고통과 긴축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단기간엔 한국사회 구성원간의 신뢰를 더 떨어뜨릴 수도 있으나 길게 보면 경쟁과 개방을 위해 필요한 변화고 이를 통해 한국은 신뢰도가 높은 사회로 다가갈 수 있다.

한 예로 강한 '가족' 의 개념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한국사회의 곳곳에 배어 있을 것이지만 기업경영 형태에서의 '가족' 개념은 의외로 빨리 부식 (腐蝕) 돼 갈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그같은 변화를 외부 요인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글로벌리제이션에 의한 통합과정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원칙과 글로벌 경제 사이에는 분명 갈등 요인이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사회 규범을 만들려고 하게 마련인데 글로벌 경제는 그런 여지를 크게 줄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를 통해 부 (富) 를 축적하려면 글로벌 룰에 따라야 하며 대외.대내가 다른 이중 기준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 글로벌 룰이 아니라 미국 기준으로의 통합 아닌가.

"나는 그것을 미국 기준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경제활동이 어떻게 조직되고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 지금 세계 질서는 머니매니저들이 새로 형성해 가고 각국 정부는 그 뒤치다꺼리를 하며, 인류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시장.금융자본에 의해 주조 (鑄造) 되는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금융자본가들은 분명히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자신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대가로서. 이것은 분명히 문제다.

이에 대한 상당한 사회적 저항이 있을 것이다."

- 자본주의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질서.규제가 출현하거나 마련되지 않았는가.

"지금은 글로벌한 질서를 미리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려면 범세계적인 정치적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의 세계엔 그런 합의가 없다."

- 한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 역시 신뢰의 상실에 있다고 보는가.

"나는 한 사회의 낮은 신뢰도가 경제성장을 절대적으로 좌우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지난 주 스탠퍼드대의 후버연구소에서 열린 한국 관련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한국은 요즘 매우 좋은 상황을 맞고 있음을 알았다.

물론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선거를 통해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참된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줄이며 제도.타협을 통한 정상적 정치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 에 대한 문화.역사적 전통이 앞으로도 오랜 기간 남아 있겠지만 공공제도.조직 속에서의 신뢰를 한국은 얼마든지 구축할 수 있다.

한보 스캔들 등이 한국사회 속에서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지만 여러가지 사회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은 헝가리.체코.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보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다.

선출된 공직자들에 대한 신뢰 회복이 한국으로선 특히 중요하다고 본다."

- 이른바 '아시아 밸류' 가 요즘 미국사회에서 형편없이 깎여 내려가고 있는데.

"아시아 밸류가 그간의 경제성장을 이끈 주요 원인은 아니었다.

예컨대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보면 성장전략뿐만 아니라 위기의 요인도 전혀 달랐다.

금융에 대한 정부통제가 인도네시아는 너무 약했기에, 한국은 너무 강했기에 위기가 닥쳤지 않은가. 아시아 밸류는 따라서 이번 아시아 위기의 주요 원인이 아니다.

아시아 밸류는 앞으로도 사회 곳곳에 매우 중요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워싱턴 = 김수길 특파원

후쿠야마 교수 약력

▶52년 미 시카고 태생의 일본계 미국인

▶74년 미 코넬대 졸업 (서양고전학 전공)

▶76년 미 군비통제 및 군축기관 (ACDA) 연구원

▶81년 하버드대에서 '소련외교정책 및 중동외교정책' 으로 박사학위

▶89~90년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 부실장

▶79~81, 83~89년 랜드연구소 연구원

▶현 조지 메이슨대 교수

▶주요저서 : '역사의 종언' '제3세계 문제에서 미.소의 협력과 반목' '트러스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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