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실업시대]1.피할 수 없는 해고사태(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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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0%를 정리해고 할 것인가, 기업도산으로 전원이 일자리를 잃을 것인가."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대량실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시시각각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한번 실기 (失機) 하면 한국경제가 재기불능 상태에 빠진다는 점에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어수봉 (魚秀鳳) 연구위원은 "현재의 위기는 대외신뢰도 하락으로 인해 외환자금시장이 급격히 경색되면서 발생했다" 며 "따라서 현재로서는 급속한 기업구조조정 이외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실업이 증가하는 것은 불가항력" 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단기적 실업증가와 실질임금 하락은 구조조정이 빠르게 진행된다는 인식을 나라 안팎에 불러일으키는 한편 기업 수익성도 향상시켜 구조조정기간을 단축시킬 것" 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일부의 일시적 희생을 통해 전부가 살아남는 지혜가 필요한 긴박한 상황인 것이다.

한국을 강타한 사상 초유의 대량해고 태풍의 진원지는 한때 '감원의 무풍지대' 로 불렸던 금융기관들. 비교적 경영실적이 우수한 한 후발은행의 행장은 "우리에 비해 인력이 4분의1 이하라는 선진은행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감량경영과 생산성향상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고 강조했다.

현재 금융산업 종사자는 약 30만명. 평균임금은 월 2백만원으로 전산업 평균 1백50만원보다 높다.

고임금 사무직인 금융산업 근로자의 실직과 임금삭감은 경제.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줄 것이 확실시된다.

이보다 심각한 사태는 한계기업의 도산으로 인한 실업. 기업이 제때 구조조정을 하지 못할 경우 맞게 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는 한꺼번에 수백명, 수천명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최대의 정리해고라 할 수 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기업의 연쇄 도산으로 인한 실업사태는 이같은 우울한 상황이 현실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교 및 대학졸업자가 2월중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함에 따라 1분기의 실업률이 일시적으로 5% 수준으로 급등, 실업자수가 1백20만명에 육박할 가능성도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부분의 고통이 경제사회의 약자에게로 집중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멕시코.영국.미국 등 산업구조조정이 급격히 진행된 국가의 경우 소득분배 악화가 수반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대규모 실업사태를 무작정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존엄성 훼손.이혼 등 가족정의 파괴.노사간 신뢰의 파괴.폭력시위 등 경제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 박인상 (朴仁相) 위원장은 "고용조정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기업주들의 사재 출연과 경영 투명성의 확보 등 설득력 있는 자구노력을 통해 근로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고 주문했다.

이와 함께 치밀한 준비가 없는 대규모 정리해고로는 경영위기 극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일부 초우량기업을 제외하고는 정리해고를 단행한 뒤 결국 도산.폐업을 겪은 사례가 적지않았다.

기업의 정리해고 발표를 채권자들이 경영위기의 최종신호로 받아들여 채권회수 압력을 가중, 도산이 촉발되곤 했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재구 (金載久) 연구위원은 "일시해고때 기업내 선임자 우선보호 (seniority rule) 등의 합리적 기준을 적용해 기업의 핵심역량을 보호하고 노사간 신뢰도 유지하는 미국 초우량기업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내년 이후 한국경제가 국제통화기금 (IMF) 충격에서 벗어나 5%대의 성장을 지속한다 하더라도 1백만명대 실업이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제 1백만명의 실업자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견실한 사회보호체제의 구축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이하경.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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