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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유래]파주 문산읍…홍수때마다 흙탕물 쌓인데서 붙여진 곳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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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파주시문산읍 (汶山邑) 은 지리적으로 임진강변에 위치, 구석기시대부터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유서깊은 곳. 하지만 홍수가 지기만하면 임진강으로 흘러내려가던 흙탕물이 서해의 조수에 거꾸로 밀리면서 산더미처럼 쌓인다 해서 이같이 이름붙여졌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땅으로 술이홀 (述爾忽)에 속했던 이곳은 조선개국과 더불어 군 (郡) 으로 승격된 파주관할이 되었다.

'汶山' 이란 공식지명이 등장한 것은 광무3년 (1899) 행정구역개편때 파주군칠정면 (坡州郡七井面) 소속의 문산포 (汶山浦)가 처음으로, 이전까지는 상문포 (上汶浦).하문포 (下汶浦) 란 명칭만 있었다.

이후 일제때인 1914년 군소재인 문산리를 중심으로 임진면이 됐다가 지난 73년 읍으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서울근교인데다 임진강변의 수려한 경관 탓에 조선때 유명인사들의 낙향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조선 최고의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꼽히는 황희 (黃喜 : 1363~1452) 정승. 워낙 추앙을 받아 '황희 황정승' 으로 중복 확인된 이름으로 불리는 선생은 공민왕12년 개성에서 태어나 13살부터 벼슬길에 나섰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칩거하기도 했던 인물. 이후 "백성을 살리기위해" 태조3년 (1394) 성균관학관으로 조선에 출사, 사헌부감찰.도승지를 비롯 육조판서를 모두 거쳤으며 좌.우의정 6년, 문종때까지 '일인지하 만인지상' 인 영의정만 무려 19년을 지냈다.

이같이 화려한 벼슬에 있으면서도 황선생은 조석때마다 끼니를 걱정했을 정도였는데 영의정 시절 참의를 지내던 맏아들이 고래등같은 집을 짓고 고관대작들이 모인 가운데 낙성식을 호화판으로 벌이자 요즘말로 "정경유착했음이 틀림없다" 며 자리를 박차고 나올 정도로 청렴을 앞장서 실천했다.

뿐만아니라 그는 강직함도 남달라 1414년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양녕 (讓寧) 대군의 폐출을 반대, 태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는가 하면 4년뒤 충녕 (忠寧) 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다시 이를 반대하다 서인으로 격하돼 교하.남원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특히 인물 보는 눈이 뛰어나 김종서 (金宗瑞)가 육진 (六鎭) 개척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패기를 앞세우자 덕으로 감화시켜 뒷날 고명지신 (顧命之臣) 이 될 정도의 국가 동량으로 키워낸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미수 (米壽)에 사직한뒤 이곳 반구정 (伴鷗亭)에 머물면서도 국가의 위급때마다 '해결사' 로 불려다니다 93세로 타계, 탄현면금승리에 묻혔다.

사목리에는 지금도 반구정과 함께 선생의 영당 (影堂) 이 있어 각각 도지정문화재자료12호, 도지정기념물 29호로 보존되고 있다.

'속임수로 벼슬을 지키려는 관료' 들로 인해 온나라가 얼어붙고 있는 이때 '황희 황정승' 같은 인물이 그리울 뿐이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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