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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17. 문현장의 자유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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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1964년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놓고 벌인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후반 12분쯤 5반칙으로 퇴장당한 필자(右)가 벤치에 앉아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있다.

나는 기업은행으로 팀을 옮겼다. 오전엔 은행 일을 하고 오후에 농구를 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30~40대엔 정상적인 은행원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은행 업무에 소홀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프로스포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운동선수는 은퇴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1964년이 되자 체육계는 도쿄올림픽으로 술렁거렸다. 농구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시아에선 주최국인 일본만 출전권을 확보한 상태였다. 한국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예선에 출전해야만 했다. 아홉팀 중 4위 안에 들어야 도쿄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때 대표팀 멤버는 나와 문현장.방열(경원대 교수).김종선.김영일.하의건(KBL 심판위원장).김무현(LG농구단 고문).김인건.신동파.정진봉(KBL 경기위원).김승규.이병구 등 12명이었다. 이 중 나와 문현장을 제외하곤 신예 선수들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훈련한 뒤 올림픽 티켓 확보라는 큰 꿈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첫 상대는 강호 쿠바였다. 우리는 국내에서 장신의 미8군팀과 많은 연습경기를 치러 장신팀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한 상태였다. 패기를 앞세워 초반부터 앞서나간 끝에 6점 차로 이겼다. 첫 승리를 거둔 우리는 올림픽 티켓을 낙관했으나 호주.캐나다에 잇따라 졌다. 태국에 이겨 2승2패의 전적으로 멕시코와 중요한 일전을 치르게 됐다.

이 경기는 라디오로 국내에 중계됐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는 팬이 많다. 이날 한국의 스타팅 멤버는 가드에 김영기와 김인건, 센터에 김영일, 포워드에 정진봉과 신동파였다. 문현장은 감기에 걸려 제외됐다. 한국은 당시 도쿄에 와 있던 대선배 이성구씨의 충고를 받아들여 1-3-1 지역방어로 멕시코의 공격을 봉쇄하며 줄곧 앞서나갔다. 후반 한때는 10여점이나 앞섰다.

그런데 후반 12분쯤 내가 네번째라고 생각한 반칙을 범하는 순간 본부석에서 5반칙 표지판을 들어올렸다. 나로선 국제대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5반칙 퇴장이었다. 이후 멕시코가 거세게 추격해와 경기 종료 3분을 남기고 한국은 74-68로 쫓기는 처지가 됐다. 노련한 플레이로 공격 시간을 끌어 줄 선수가 필요했다. 코치진은 벤치에 앉아 있던 문현장을 코트로 내보냈다.

여기서 그의 불행이 싹텄다. 종료 40초를 남기고 77-74로 앞선 한국은 멕시코의 파울 작전으로 자유투를 얻었다. 문현장은 두개 모두 실패했다. 77-76으로 쫓기는 상황에서 문현장이 드리블하는 순간 또다시 고의 파울이 나왔다. 남은 시간은 불과 5초. 그런데 바짝 얼어붙은 문현장은 그 소중한 자유투 두개마저 모두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리바운드 볼을 잡은 멕시코 선수는 종료 버저와 동시에 슛을 날렸다. 공은 림을 세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 밖으로 튀어나가는 것 같았던 볼은 백보드를 맞더니 그만 골인되고 말았다. 우리는 모두 주저앉았다. 그때 심판을 향해 한 선수가 뛰어갔다. 방열이었다. 골인을 선언하려는 우루과이인 심판을 끌어안더니 "안돼요, 안돼요"하며 울부짖었다. 문현장은 코트에서 얼굴을 감싸고 오열했다. 우리는 39분59초를 앞서다 마지막 1초를 견디지 못하고 역전패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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