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무림]제3부 13.진검승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바람이 몹시 차다.

대지는 꽁꽁 얼어붙었다.

갑작스레 몰려온 한파탓이다.

그러나 오늘 이 땅의 백성들이 몸서리치도록 추위를 느끼는 건 꼭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한 건 오히려 나라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걸려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엉터리 무림지존 공삼거사와 그의 뻔뻔한 관리들은 나라의 명운이 꼴깍 넘어가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배짱 좋게 나 몰라라 딴전을 피웠다.

그리고 그 결과, 중원무림엔 사상 초유의 대혼란이 왔다.

은장 (銀庄) 이 줄줄이 쓰러지고 중원의 화폐는 거의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황금의 철옹성을 자랑하던 상벌 (商閥) 들도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다.

자고 나면 나라 살림이 뭉텅뭉텅 거덜나는 나날이 이어졌다.

백성의 눈과 귀는 온통 이 절망과 암흑의 시절이 얼마나 계속되고, 언제 끝날 것인가에 쏠렸다.

닷새. 불과 닷새 앞으로 다가 온 무림지존비무대회가 유난히 썰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아예 기력을 잃었고 누가 무림지존이 되든 이 암울한 시절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무림경제를 암흑의 나락에서 구할 무림지존의 탄생, 그것이 백성들의 첫번째 소망이었다.

그러나 대중검자.회창객.인제거사 세 사람은 케케묵은 흑색무공으로 이전투구를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은 차선 (次善) 이 아니라 차악 (次惡) 을 선택해야 했다.

어느 백성인들 흠집투성이의 무림지존을 원하랴. 자연히 민심은 지존비무를 코앞에 두고도 종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역대 지존비무 중 이번처럼 지독한 혼전이 마지막까지 계속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모의전쟁 분석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을까. '매일 무림지존이 바뀐다' 라고. 대중검자의 일산 저택. 늘 그래 왔듯이 대중검자는 재건시종장.한길공.동영검사 등과 아침식사를 겸한 전략회의를 열고 있었다.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화기애애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대중검자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회창객, 그자가 급하긴 급했나 보오. 둘째아들을 급히 불러들인 것을 보면. 하지만 그건 참으로 미련한 짓이오. 키를 쟀다고 해서 진짜 인제거사가 사퇴를 하겠오?

그럴 인제거사라면 애초에 신한국방 후계자 비무에 불복하고 뛰쳐나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당장 몸무게도 안 재고 그냥 내뺐다고 역공을 취하는 인제거사를 보시오. 회창객으로선 긁어 부스럼만 된 꼴이 아니오?" 동영검사가 맞장구를 쳤다.

"효과가 거의 다 사라졌던 두아들살빼고군대안보내기초식이 다시 위력을 발휘하게 도와준 셈이지요.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원. " 한길공이 거들었다.

"덕택에 우리도 득을 봤지요. 위력이 떨어져 포기하려던 첫째아들억지로살빼기폭로공격이 망외의 효과를 봤습니다.

부재자 비무를 하루 앞두고 70만 군심 (軍心) 을 완전히 사로잡은 성공작이었습니다."

대중검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이를 말씀이오. 그나저나 증인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

비무가 끝날 때까진 절대 무림감찰의 수사에 응해선 안돼요. 독이 오른 한나라방이 무림감찰을 핍박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릅니다."

재건시종장이 화제를 바꿨다.

"벌써부터 무림언론들이 앞다퉈 주군께서 무림지존이 된 후 어떻게 중원을 다스릴 것인지를 알려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사실상 승부는 끝났다는 얘기지요. " "허허,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려. 이렇게 얘기하시오. 내각무림을 만들기 전에 온 힘을 다해 무림경제를 살려놓을 것이라고. 양이 (洋夷) 와 왜구 (倭寇) 를 다루는 데는 나를 따라갈 사람이 대명천지에 없소. 공삼 앞에선 큰소리를 뻥뻥 쳐댄 천하의 강두시 (剛頭矢) 라 해도 내 앞에선 부처님 손바닥안의 손오공에 불과하오. 내 그들을 적절히 요리하고 다독거려 한해가 가기 전에 무림백성의 치욕을 씻어줄 것이오. " "지당한 말씀. 그나저나 주군의 이런 충정과 실력을 몰라주고 강두시와 추가협상을 하겠다는 말만으로 마치 작금의 사태에 대한 책임이 주군께 있는 것처럼 몰아붙이는 회창객과 그 장단에 놀아나는 무림언론의 작태는 참으로 한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누가 중원무림에 광명을 가져올 진정한 지존인지 따져보면 금세 알텐데도 말입니다.

" "다 잊어버립시다.

우리는 이제 50여 성상 (星霜) 만에 처음으로 맞는 재야무림출신 무림지존 시대를 어떻게 멋지게 꾸려갈 것인지만 염두에 둘 때요. 앞만 보고 달려갑시다.

나는 속 빈 공삼과는 달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무림지존으로 백성들의 가슴에 남고자 하오. 그러려면 여러분들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좌중의 군중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주군의 대업을 이루는 데 견마지로 (犬馬之勞) 를 다하리다. "

회창객은 초조했다.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뒤를 쫓는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중검자는 여전히 앞서가고 있었다.

인제거사 역시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하면서도 오뚝이처럼 버티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패배가 불 보듯 뻔했다.

비장의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회창객은 이를 악물었다.

내일의 만인전시기 논검비무가 최후의 승부처였다.

여기서마저 대중검자의 기세를 꺾지 못하면 닷새 뒤 지존비무의 승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승부수는 세가지입니다.

세가지 다 성공하면 필승이고 두가지만 성공하면 박빙의 승부가 될 것입니다.

한가지만 성공하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고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면 필패입니다."

상목소자의 음성이 회창객의 상념을 뚫고 들려왔다.

회창객은 어서 말을 계속하라는 듯이 상목소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첫째 강두시와의 재협상 운운으로 무림경제를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대중검자의 무책임을 공격해야 합니다.

이게 성공하면 대중검자의 세력은 단숨에 무너집니다.

주군께서 사실상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는?" "둘째 일구이언이부지자 (一口二言二父之子) 초식으로 인제거사를 완전히 눌러앉혀야 합니다.

말바꾸기 전문가에게 어찌 일령여산 (一令如山 : 명령의 위엄이 태산과 같음) 이어야 할 무림지존의 중책을 맡기겠냐는 걸 강조해야 합니다.

강두시가 비무대회 출전자 삼인에게 각서를 받은 것도 다 경선에 불복한 인제거사와 재협상 운운하는 대중검자를 못 믿어 그랬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은?" "흑색무공금지와 지존비무후 백의종군 선언입니다.

무림백성들은 이전투구식 지존비무가 중원경제를 더욱 나락으로 빠뜨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누가 지존좌를 차지하든 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주군께선 본인 아닌 누가 지존좌에 오르든 힘을 합해 무림경제를 살리는 데 앞장서겠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그리 되면 나랏일은 뒷전인 채 지존쟁투에 여념 없는 무림인들에게 실망해 흩어진 민심이 주군께 몰릴 것입니다.

덧붙여 인제거사처럼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승자의 뒷다리를 잡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한 방책입니다."

"그렇게만 공격하면 틀림없이 우리가 승리하겠소?" "틀림없습니다."

"북풍은 어떻소?" "안됩니다.

오히려 주군만 상처받고 말 겁니다."

"원종검이 인제거사를 주저앉히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만 그건 어떻게 돼가고 있소?" "별무소득입니다.

인제거사가 완강히 버티고 있습니다.

이번 지존비무에서 2할의 세력만 차지해도 다음 지존시대에서 자신의 입지를 충분히 세울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찬종검이 인제거사와 손을 잡은 것도 역시 그래서겠지요?" "그자는 잊어버리십시오. 본래 그자의 성명 (成名) 무공이 이리기웃저리가담초식 아닙니까. 찬종검도 지금 상황에선 별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찬종검은 뺏겼지만 대신 철혈대제 (鐵血大帝) 박통 (朴統) 의 영애 근혜소저가 가세했습니다.

실보다는 득이 큰 장사입니다.

어설프게 박통의 무공을 흉내내던 인제거사의 콧대를 눌러놓은 데다 무림경제 재건의 적임자가 주군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여튼 이번 마지막 만인전시기 논검비무는 그야말로 진검승부가 되겠구려. 죽느냐 사느냐의. " 회창객의 비장한 어조에 홀린 듯 상목소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진검승부죠. 죽느냐 사느냐의. " 인제거사는 조금씩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두차례 만인전시기 논검비무에서 이득을 취하긴 했지만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단숨에 대중검자며 회창객을 거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대중검자의 승리를 막을 수 없었다.

재여무림의 힘이 두갈래로 갈려서는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승부였다.

무조건 회창객을 쓰러뜨려야 한다.

무조건. 인제거사가 엊그제 수성객을 다시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을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아야 했다.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 "도와주십시오. 여기 찬종검께서도 저를 돕기로 했습니다.

이제 총장어르신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두분이서 제 좌우 호법 (護法) 이 돼주십시오. 그리되면 영남무림의 모든 힘이 통째로 제게 올 것입니다."

인제거사는 만섭방주와 찬종검을 대동하고 수성객에게 읍소했다.

찬종검도 거들었다.

그러나 수성객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오. 훗날 달리 연 (緣) 이 닿으리다.

그때는 내 사양하지 않으리다."

인제거사는 씁쓸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끌어모을 고수도 없다.

내일의 만인전시기 출연은 그런 점에서 인제거사에겐 최후의 승부처였다.

확실한 공격으로 회창객과 대중검자를 단숨에 무력화해야 했다.

그러나 내일의 싸움은 앞서 두번보다 훨씬 힘들 것이었다.

잘못하면 크게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괜히 수하의 말만 믿고 회창객의 둘째 아들 키를 재자고 우긴 게 잘못이었다.

회창객이 아들을 불러들여 정말 키를 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칫 실수했다간 내가 던진 칼에 내가 찔릴 판이었다.

그러나 꾀많은 토끼는 늘 두개의 굴을 파놓는 법. 인제거사는 즉시 역공을 취했다.

회창객의 아들이 몸무게도 재지 않고 내빼듯이 도망친 것은 스스로 불리함을 인정한 것이라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 인제거사에겐 그게 있었다.

내일의 논검비무는 진검승부가 될 것이었다.

먹느냐 먹히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회창객은 사력을 다해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나 나 인제거사는 당당히 싸워 이길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라도. 게다가 인제거사에겐 질래야 질 수 없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겨울비를 맞으며 저잣거리에서 백성들에게 큰 절을 올린 아내 은숙선자의 간절한 염원, 바로 그것이었다.

신한국방 후계자 비무뒤 맹세하지 않았던가.

절대 아내를 두번 울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는 지켜질 것이다.

기필코.

<이정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