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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한국인은 한국영화가 더 오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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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소복을 한 원한에 가득찬 여인, 벽장이나 어두컴컴한 곳에서 조용히 나타나는 귀신…. "(한국 공포영화)

"피가 흥건하고, 갑자기 흉물스럽게 생긴 악령.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죽이는가 하면 곳곳에 가득한 해골…. "(서양 공포영화)

이들은 한국과 서양의 공포영화에 각각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러면 한국 사람한테 한국의 공포영화(또는 드라마)와 서양의 공포영화를 보여줬을 때 어떤 것이 더 무섭다고 느낄까. 답은 한국 영화를 볼 때 훨씬 더 무서움을 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느낌뿐 아니라 생리적으로도 무서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재호 교수팀이 전형적인 동.서양 공포 영상물을 골라 50명을 대상으로 실험해 얻은 결과다. 영상물은 SBS가 1997년부터 방영했던 '토요 미스터리극장' 중 '비오는 날의 방문객''벽 속에서 나온 아이 시체'를, 서양 영화로는 '데드캠프(원제:Wrong Turn)''이블 데드(The Evil Dead)'를 골랐다. 실험 대상인 A집단(20명)에는 이들 네편의 영상물을 모두 보여주었으며, B집단(30명)에는 네편과는 상관없는 동서양 영화 중 무작위로 무섭게 느껴지는 장면을 16장씩 모두 32장을 정지화면으로 골라 보여줬다.

네편의 영화를 본 집단에 속한 개개인에 대해서는 공포영화를 볼 때 피부 전기반응이 어느 정도 일어나는지를 측정했다. 공포를 많이 느끼면 전기 자극 횟수가 많고, 강도 역시 세게 일어나 그래프상의 삐죽 올라가는 부분이 높게 나타난다.

토요 미스터리극장을 볼 때는 피부 전기반응이 모두 279회나 일어난 반면, 서양 영화는 209회에 그쳤다. 전기반응 중 공포감을 크게 느낄 때 나타나는 아주 높은 그래프 값은 토요 미스터리극장이 35회나 일어났으나, 서양 영화는 22회에 그쳤다. 전기반응이 높게 나타나는 시점은 토요 미스터리극장 중 벽 속에서 아이 시체가 나올 때나, 검은 손의 그림자가 벽에서 스멀스멀 나올 때 등이었다. 데드캠프에서는 주인공들이 숨어 있는 곳에 핏물이 고이고, 그곳에 떨어진 열쇠를 살인마가 집으려는 순간 등이다. 이렇게 전기반응이 세게 일어날 때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오싹함을 느낀다.

정지영상의 경우도 한국 것은 4점 만점에 2. 56점이, 서양 것은 2. 21점이 나왔다.

무서움에 대한 기억도 한국 공포 영상물이 서양 것에 비해 훨씬 길게 지속됐다. 서양 공포영화는 볼 때만 어느 정도의 공포감을 주지만 보고 나면 잊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실험 대상자 상당수는 서양 영화에서 피가 범벅이 되거나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이 한국 영화 장면인 이불 속에서 귀신이 나오는 것보다는 덜 무섭게 느꼈다.

이 교수는 "문화의 차이가 공포감을 느끼는 감각도 다르게 만든다는 것이 확인된 결과"라며 "이는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공포 상황이 현실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 뇌리에 각인돼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즉 공포에 대한 기억이 많이 있을수록 영화를 보거나 어떤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면 그 기억들이 재빠르게 재생돼 공포감을 더 느낀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 전통적인 공포영화 소재인 귀신과 한을 활용한 '여고 괴담'과 같은 영화가 흥행을 거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포영화는 주로 밤을 무대로 하며, 귀신.원한 등이 주요 소재다. 또 교교할 정도로 조용한 상황에서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서양 공포영화는 살인마의 등장으로 피범벅이 되거나, 악령.괴물의 소름끼치는 행각이 주로 등장한다. 서양 공포영화는 즉각적인 시각 자극 중심으로 공포심을 조성하는 반면 한국 공포영화는 분위기 중심으로 이뤄지는 차이 때문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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