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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예술 넘나든 이상, 아직 해석 여지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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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굿바이.”

시인·소설가이자 화가·건축가였던 이상의 기일(17일)을 앞두고 다섯 권짜리 『이상 전집』이 나왔다. 엮은이 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이상의 문학 세계에서는 한 작품의 정확한 의미가 다른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특히 정밀한 독서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단편소설 ‘날개’, 난해시 ‘오감도’ 등 시대를 훌쩍 앞선 작품들을 남긴 이상(李箱, 1910∼37·본명 김해경). 17일은 그의 기일(忌日)이다. 그는 아무도 그의 죽음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일본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스물 여덟 짧은 생을 쓸쓸히 마감했다. 거동 수상자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한 달쯤 조사받다가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돼 변을 당했다. 그는 한 해 전인 1936년 10월 “앞으로는 정통 시·소설을 쓰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새로운 삶을 찾아 일본으로 떠났었다.

기일에 맞춰 출간된 다섯 권짜리 『이상 전집』(문학에디션 뿔)을 편집하고 주요 작품들을 새롭게 해석한 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이상의 전 작품을 통독하다 보니 몇 가지 오독(誤讀) 사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대표 사례가 그동안 ‘성애시(性愛詩)’로 해석됐던 ‘차8씨의 출발’이다. 권 교수는 “‘차8씨의 출발’은 이상이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1906∼53)의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쓴 시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기생 금홍과의 동거 등 평범치 않던 이상 개인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작품 자체를 보다 정밀하게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8씨’는 화가 구본웅=‘차8씨의 출발’은 일본어로 씌여진 시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 서울대 건축과)를 수석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技手)로 발령받은 이상은 일본인 건축가들이 주축이 된 ‘조선건축회’의 일본어 학회지 ‘조선과건축’에 32년 ‘且8氏の出發’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발표했다.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 중 한 편으로 대표적인 난해시로 꼽힌다.

그동안 ‘차8씨’는 남성 성기(性器)를 은유한 매개물로 보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었다. ‘且(차)’자 밑에 숫자 ‘8’을 눕혀 배치할 경우, 남성 성기와 비슷한 모습인데다 그래야 시의 첫 행 ‘균열이생긴장가이녕의땅에한대의곤봉을꽂음’이 매끄럽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장가이녕(莊稼泥<6FD8>)’은 농가의 진흙탕을 뜻한다. ‘곤봉’ 역시 남성 상징으로 읽기 쉽다. 결국 첫 행은 남녀 성교를 뜻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且’는 구본웅이 즐겨 쓰던 중산모, ‘8’은 꼽추였던 구본웅의 기형적 신체를 표현한 것”이라는 새 주석을 달았다. 구본웅이 선물한 ‘오얏나무 화구 상자(李箱)’를 필명으로 삼을 만큼 절친했던 이상이 일본 화단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31년 금의환향한 구본웅에 바친 헌시라는 것이다. 권 교수는 “따라서 첫 행은 ‘기반이 허약한 미술계에 붓(곤봉)을 꽂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연작시 ‘위독’ 중 한 편인 ‘매춘(買春)’도 ‘판다’는 뜻의 ‘賣’자가 아닌 ‘산다’는 뜻의 ‘買’자를 사용한 만큼 몸 파는 매춘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젊음을 사다’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핵을 앓은 이상의 개인 사정이 반영된 시라는 뜻에서다.

◆정확하고 알기 쉬운 전집=권 교수는 “임종국 편 『이상 전집』, 이어령 편 『이상시전작집』 등 기존의 전집 판본들을 비교해 이번에 ‘원전 확정’을 시도했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같은 주석을 붙였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 편의 시는 한자를 모두 한글로 고친 시 전문, 한자를 그대로 둔 발표 당시 원문, 권 교수의 시 해설, 주석 등 ‘4단계 구성’을 통해 소개된다.

권 교수는 “이상은 시·소설은 물론 그림·건축 등 여러 예술 장르의 경계와 울타리를 뛰어넘는 작업을 한 모더니스트이자 여전히 문제적인 작가이기에 앞으로도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많다”고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신준봉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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