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굿바이.”
시인·소설가이자 화가·건축가였던 이상의 기일(17일)을 앞두고 다섯 권짜리 『이상 전집』이 나왔다. 엮은이 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이상의 문학 세계에서는 한 작품의 정확한 의미가 다른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특히 정밀한 독서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기일에 맞춰 출간된 다섯 권짜리 『이상 전집』(문학에디션 뿔)을 편집하고 주요 작품들을 새롭게 해석한 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이상의 전 작품을 통독하다 보니 몇 가지 오독(誤讀) 사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대표 사례가 그동안 ‘성애시(性愛詩)’로 해석됐던 ‘차8씨의 출발’이다. 권 교수는 “‘차8씨의 출발’은 이상이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1906∼53)의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쓴 시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기생 금홍과의 동거 등 평범치 않던 이상 개인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작품 자체를 보다 정밀하게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8씨’는 화가 구본웅=‘차8씨의 출발’은 일본어로 씌여진 시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 서울대 건축과)를 수석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技手)로 발령받은 이상은 일본인 건축가들이 주축이 된 ‘조선건축회’의 일본어 학회지 ‘조선과건축’에 32년 ‘且8氏の出發’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발표했다.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 중 한 편으로 대표적인 난해시로 꼽힌다.
그동안 ‘차8씨’는 남성 성기(性器)를 은유한 매개물로 보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었다. ‘且(차)’자 밑에 숫자 ‘8’을 눕혀 배치할 경우, 남성 성기와 비슷한 모습인데다 그래야 시의 첫 행 ‘균열이생긴장가이녕의땅에한대의곤봉을꽂음’이 매끄럽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장가이녕(莊稼泥<6FD8>)’은 농가의 진흙탕을 뜻한다. ‘곤봉’ 역시 남성 상징으로 읽기 쉽다. 결국 첫 행은 남녀 성교를 뜻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且’는 구본웅이 즐겨 쓰던 중산모, ‘8’은 꼽추였던 구본웅의 기형적 신체를 표현한 것”이라는 새 주석을 달았다. 구본웅이 선물한 ‘오얏나무 화구 상자(李箱)’를 필명으로 삼을 만큼 절친했던 이상이 일본 화단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31년 금의환향한 구본웅에 바친 헌시라는 것이다. 권 교수는 “따라서 첫 행은 ‘기반이 허약한 미술계에 붓(곤봉)을 꽂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연작시 ‘위독’ 중 한 편인 ‘매춘(買春)’도 ‘판다’는 뜻의 ‘賣’자가 아닌 ‘산다’는 뜻의 ‘買’자를 사용한 만큼 몸 파는 매춘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젊음을 사다’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핵을 앓은 이상의 개인 사정이 반영된 시라는 뜻에서다.
◆정확하고 알기 쉬운 전집=권 교수는 “임종국 편 『이상 전집』, 이어령 편 『이상시전작집』 등 기존의 전집 판본들을 비교해 이번에 ‘원전 확정’을 시도했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같은 주석을 붙였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 편의 시는 한자를 모두 한글로 고친 시 전문, 한자를 그대로 둔 발표 당시 원문, 권 교수의 시 해설, 주석 등 ‘4단계 구성’을 통해 소개된다.
권 교수는 “이상은 시·소설은 물론 그림·건축 등 여러 예술 장르의 경계와 울타리를 뛰어넘는 작업을 한 모더니스트이자 여전히 문제적인 작가이기에 앞으로도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많다”고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