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의 사람구경]9.킬리만자로의 세 표범…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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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구보씨가 어릴 적만 해도 사내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십중팔구 대통령 아니면 장군이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시절은 그 두가지가 별로 다르지 않은 군부독재의 암흑시대였다.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하고서는 장군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되고는 했다.

구보씨는 바로 박정희 전대통령이 처음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던 해에, 그러니까 군복을 벗던 해에 태어났다.

그랬으므로 당연히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전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나중에야 그 분이 불미스런 일을 저지르고 불행한 망명길에 올라 머나먼 타국땅에서 생을 마감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은 이 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독립운동을 하신 적도 있다던데, 망명지에서의 죽음은 전직 독립운동가의 최후로 적당했던 것도 같다.

구보씨 나이 꽃다운 열일곱이 되도록 여전히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므로 그때까지 대통령은 박정희씨가 끝까지 맡아서 하기로 되어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분이 철천지 원수 김일성 북한 괴뢰도당이 아니라 심복 중의 심복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구보씨는 뭔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게 뭔지는 밝힐 수 없다.

요즘 여러 신문에 앞다투어 실리고 있는 그분의 일대기를 가끔씩 들여다보며 구보씨는 그분의 최후도 거의 정답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럴 수밖에. 그 뒤를 이어 구보씨의 20대를, 그러니까 소위 1980년대를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전두환 노태우 두 전대통령은 어떻게 되었는가.

범죄자로 판정받고 영어의 몸이 되어있지 않은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보안사령관도 같이 하고 진급하던 순서대로 대통령도 '사이좋게' 하더니 감옥까지 같이 가있는 걸 보면 그분들은 정말이지 둘도 없는 친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죽을 때도 죽어서도 심지어는 다시 태어나서도 아름다운 우정에 변함이 없기를. 다음은 아직 임기가 70일 정도 남았지만 대통령이어도 이미 대통령이 아닌 김영삼 현 대통령. 지난 5년 간이 어떠했는지는 다시 언급하고 싶지도 않고, 내년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차마 이야기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끔찍할 뿐이다.

오늘 구경하기로 되어있는 사람들은 이미 대통령을 역임했던 그분들이 아니라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온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회창.김대중.이인제 세 후보가 아니던가요. 요즘 장안의 초미의 관심사인 그분들의 합동토론회를 구경하고 재미있게 이야기해주기로 되어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시작도 하지 않은 그분들 앞에서 왜 끝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 저의가 뭐죠?

왜 불길한 주술을 걸려고 하는 거죠?

구보씨?

벌써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구보씨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말하자면, 다시는 실수하지 말자는 의미에서죠. 불길한 법칙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자꾸 되뇌어 주문을 외우는 것은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말라는, 악귀들은 물러가라는 뜻이지요.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좋다.

그러면 옛날 이야기는 그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현재의 대통령 후보 미래의 대통령을 구경하기로 하자. 그런데 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건 다 옛날 사람들 그대로인가?

아무튼지간에, 구보씨는 토론회를 구경했고, 이제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있었던 그대로는 하기 싫어서, 그냥 마음대로 지어서 하기로 한다.

사람1.사람2.사람3이라고 부를테니 그들이 각자 누구인지는 알아서 읽으시기를. 구보 : 다시 말하지만,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로 대통령을 하신 분들은 다 끝이 좋지 않았다.

그걸 아는가? 모두 : 안다.

구보 : 그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 오르려 애쓰는 이유는?

모두 : 묻지 마라. 구보 : 꼭 대답을 듣고 싶다.

누군가 : 21세기가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구보 : (사람1에게) 차남의 키를 재보고 병역면제의 의혹이 풀리면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후보가 있다.

그럴 용의는?

사람1: 그 후보가 사퇴하게 될 것 같아 유감스럽다.

구보 : 곧 그렇게 하겠다는 말인가?

사람1: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구보 : 그 후보가 사퇴하면 당신이 당선될 확률이 매우 높다.

거의 당선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만약 당신이 하지 않는다면 상대후보들이 주장하는 의혹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사람1: 낡은 레코드는 그만 틀어라. 구보 : 당신은 상대후보의 친인척들 은행계좌를 조사한 불법자료를 폭로용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 입수경로를 밝힐 용의가 있는가?

사람1: 이미 밝힌 대로 당에 제보된 것이다.

구보 : 수사기관과 은행감독기구를 불법으로 동원하여 조사한 것이 밝혀질 경우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라도 책임질 용의가 있는가?

사람1: 법대로 한다.

구보 : (사람2에게)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해서 앞에서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그분들은 다 당신의 정적들이었다.

그들처럼 당신도 이미 역사 속의 인물이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명예롭게 은퇴해야 하지 않았을까?

다시 말해 너무 나이가 많은 것 아닌가?

사람2: 나이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다고 했다.

귀가 순해진 지는 이미 오래다.

구보 : 그래서 보청기를 사용하는 건가?

사람2: 클린턴은 양쪽 귀에 다 사용한다.

그래도 헛것이 들리지는 않는다.

보청기도 끼지 않으면서 내가 신기하 의원을 찾는다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 헛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 터무니없는 정신질환적 흑색선전으로 고인을 욕보이지 말아라. 구보 : 당신을 보고 말을 너무 자주 바꾼다고,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다시 4번째 출마를 하게된 걸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사람2: 박정희씨나 전두환씨는 다른 사람들이 정치활동을 못하도록 해놓고 독재 대통령을 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못하도록 막고 혼자서 마음대로 우리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 아니다.

저번 선거에서 지고 은퇴를 결심했었으나 내가 필요할 것 같아 다시 나섰고 우리 당과 많은 국민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

구보 :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것을 술수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2: 박정희씨에게 납치되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것도, 전두환씨에게 반란을 선동한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도 다 술수라고 할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용의 눈물이라는 연속극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권력이란 아들에게 물려줬다가도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당원과 국민의 지지가 없다면 내가 어떻게 술수를 부려 은퇴를 했다가 복귀를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서태지가 돌아와도 술수를 부린다고 할텐가?

구보 : (사람3에게) 당신은 당내 경선에서 지고도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출마했다.

며칠 전 이란과 두번 비기고 아깝게 월드컵예선에서 탈락한 호주가 억울하다고 한국쯤은 이길 수 있노라고 본선에 진출하겠다고 우기면 어떻게 하나?

호주는 한국을 이길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면 혼란이 올 것이다.

모든 경선결과가 언제든지 무효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 반장선거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사람3: 몸무게나 키를 속여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지경인데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구보 :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그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3: 그럼 빨리 그 두 아들을 불러다가 키와 몸무게를 재보자. 의혹이 풀리면 당장이라도 후보직을 사퇴하겠다.

구보 : 이제 대한민국은 IMF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누구의 책임인가?

사람1: 세 사람이다.

성과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사람3: 그러면 우리 당의 3총사란 말인가?

사람1: 3총사도 책임을 면할 길 없겠지만, 지금 말한 세 사람은 더 거물들이다.

성은 김이요 이름은…. 여기에도 한 사람 있다.

사람2: 힘없는 현직 대통령을 몰아서 탈당시켜놓고는 자기네가 집권당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리고는 한번도 정권을 잡고 정책을 펼쳐본 적도 없는 야당의 지도자를 경제파탄의 책임자라며 발뺌하는, 삼사오륙공화국 내내 정경유착의 주인공들이었던 사람들이 무더기로 몰려 있는 당이 책임이 없다면 이건 아무의 책임도 아니다.

우연히 그렇게 됐을 뿐이다.

운이 나빴다.

사람3: 여당이건 야당이건 다 똑같았다.

야당도 정경유착에 가담했다.

그러니 거기에 가담했던 나이많은 사람들을 다 몰아내야 한다.

세대교체!

사람1: 나이가 아니라 정신이 문제다.

누구를 빗대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이가 어려도 정신이 비어있으면 어쩌나? 정신교체!

사람2: 수십년 동안 대통령 이름과 당이름만 바뀌었을 뿐 계속 정경유착으로 이 나라를 말아먹은 세력이 있다.

그들을 선거를 통해 응징해야 한다.

정권교체!

구보 : 지면관계상 이만 줄여야겠다.

바쁘신 중에도 허튼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한다.

보답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비법을 알려드리겠다.

차범근과 박찬호를 영입하라. 단, 기도를 표나게만 하지말고, 한국말을 영어식으로 발음하지 말것!

주인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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