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자, 이젠 정신을 차릴 시간이에요. 운전을 하시면서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보세요. 이건 제가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구성안인데, 혹시 들으시면서 잘못 되었다거나 개인적인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 차가 고속도로를 진입한 직후,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구성안을 펼쳐 들었다.

햇살이 따갑게 느껴져서인가, 얼핏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도 나처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나는 물었다.

"근데, 구성안을 어째서 이 피디가 직접 만든 거요?

이런 프로그램이라면 의당 구성작가가 배정되는게 상례일텐데…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아뇨.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다른 프로에는 여전히 구성 작가가 배정되고 있어요. 전 그냥…이게 제가 맡은 첫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애정도 있고 해서 직접 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그게 이상한가요?" 이상하면 말해봐라, 하는 듯이 그녀는 잠시 나의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이상하다기보다 훨씬 합리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은 거요.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결정되면 연출을 담당할 피디의 머리속에 이미 구성안이 그려질 테니 구성작가가 만들어낸 구성안에 충실하긴 어차피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이요. " "네,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성과 연출은 어차피 자웅동체 같은 거니까 따로 놀면 정말 곤란하게 되죠.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이번 경우에 한해서만 그러겠다는 거예요. 내가 연출을 맡게 된 첫 프로,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제 됐나요?" "됐소. 귀담아 들을테니 시작해봐요. " 연두색과 녹색이 보기 좋게 어울린 산과 들, 그리고 그 너머의 푸르스름한 하늘을 내다보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5월은 계절의 여왕' 이라는 말을 가슴으로 처음 깨닫게 된 게 언제였던가.

글이 써지지 않아 산과 바다를 떠돌며 보낸 1990년대 초반의 어떤 5월이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그래, 그때 온몸으로 흡입하던 5월의 빛은 얼마나 찬란하고 또한 황홀했던가!

"우선 구성안의 전체적인 흐름을 말씀 드릴께요. 구성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첫번째 파트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송라읍인데, 거기서는 이선생님의 고등학교 이학년 시절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거예요. 영어 선생님으로 발령받아 오게 된 이미랑 선생님과의 첫 조우, 그리고 이미랑 선생님에 대한 사춘기 소년으로서의 감정 변화 같은걸 당시를 반영할 수 있는 교실에서 차분하게 회고하는 거에요. " "글쎄, 회고하는 건 좋은데 당시의 교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겠소?" 시원스럽게 뻗어나간 직선 고속도로를 내다보며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어투로 물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