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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경제위기, 설마 설마 하다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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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금 경제가 위기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위기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를 1997년 외환위기 때와 같이 외환이 바닥나 국가부도 상황에 몰리는 것으로 본다면 분명히 위기가 아니다. 국제수지는 흑자가 많이 나고 있고 외환보유액은 1600억달러가 넘을 만큼 넉넉하다. 또 수출은 썩 잘되고 있고 물가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경제의 활기와 체력이 떨어져 경제가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위기라 본다면 분명히 위기다.

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대략 세차례의 큰 위기를 겪었다.74년의 1차 오일쇼크, 80년의 2차 오일쇼크, 97년의 외환 파동이 바로 그것이다. 주로 국제수지와 외환 부족에서 문제가 불거져 물가파동과 심각한 불황으로 연결되었다. 위기는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여러 위기 요인들이 쌓여 있다가 병발증을 일으키면서 급전직하로 악화되었다.

*** 외부 상처보다 속병이 더 무서워

지금 국제수지 등으로 볼 때 97년처럼 긴급사고가 나 응급실로 실려갈 가능성은 매우 작다. 그것이 낙관론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외상보다 안으로 곪는 속병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경제의 무기력증은 심각한 위기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미 무거운 가계부채 때문에 소비가 일어나기 어렵게 되어 있고 투자가 몇년째 꿈쩍하지 않고 있다. 거기다 일자리가 줄고 있고 그 중에서도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무엇보다 의욕들이 죽어 있다. 앞으로 오래 고생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일본도 어름어름하다가 10년 불황을 겪고 말았는데 그토록 오래 앓은 것도 외상없이 속병이 깊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장기침체를 겪으면서도 국제수지는 계속 흑자를 내고 물가도 안정되었다. 위기의식이 생길 리 없었다. 그래도 일본은 개인저축도 많고 제조업 기반이 단단해 10년 불황에도 견딜 수 있었다. 우리는 무얼 갖고 버틸 것인가. 가계부채는 너무 무겁고 정부도 빚이 많다.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기업이 매우 허약하다. 눈앞의 수출 호조와 국제수지 흑자 때문에 경제 모양이 괜찮게 보이지만 실상은 기진맥진해 있다. 당장의 체력보강이 시급한 실정이다.

지금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한국 경제가 매우 여유있고 튼튼한 것으로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위기의식이 자리잡을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실제 정책은 체력 회복보다 형평 추구로 기울고 있다. 지난 봄 실용주의적 정책기조가 자리잡는가 했더니 총선 후엔 분위기가 바뀌었다. 개혁의 초점도 국가경쟁력의 강화보다 옛날 것을 깨는데 맞춰져 있다. 장기적으로 형평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당장은 경제에 부담되는 정책들이 많다. 전국적 균형발전.자주국방.수도 이전 등은 명분있고 모양 좋지만 대가는 비쌀 것이다.

97년에도 장기과제에 매달리다가 실질적인 위기대응을 하지 못해 외환위기를 당하고 말았다. 그해 10월까지 여유를 부렸다. 경제의 바탕이 튼튼하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IMF 측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금융개혁법이 무산되는 등 우리의 자구노력이 시원치 않자 11월 한달 동안 집중호우에 둑 무너져 내리듯 외자가 빠져나가고 그것이 결국 국가부도 사태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 외환위기 때 실수 되풀이하나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턱도 없는 일이 벌어졌던가. 연초의 한보 사태를 비롯하여 큰 사건들이 줄을 이었고 기아 등 대기업들은 체력이 쇠약해 대형 부도가 줄을 이었다. 그 와중에서 매일 벌어지는 파업과 항의와 데모 대열,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 낭비의 연속이었다. 국정 리더십은 실종되었고 정치권은 이해 조정은커녕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켰다. 관계부처에선 애쓴다고 했지만 나라 전체를 망라한 종합전략도 실천적 의지도 보여주지 못했다.

또 다시 고유가.중국 쇼크 등 외적 충격이 왔다. 그 때와 비교해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가. 말은 무성하지만 의식이나 행동에 큰 차이가 있는가. 국정 리더십이나 대응 태세는 어떤가. 지금도 설마 설마 하면서 꼭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