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연차 비리 수사는 정치 개혁의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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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검은돈 관련 수사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 현역 의원의 줄소환이 이어질 전망이다. 비리의 양상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하다. 그동안 정치판은 많이 깨끗해졌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2004년 엄격하게 개정된 정치 관련법 덕분에 선거판에서 돈이 많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깊숙한 이면에선 추악한 부패상이 여전한 것으로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박연차 사건의 심각성은 첫째, 부패를 감시해야 할 고위 공직자들이 직접 연루됐다는 점에서 뚜렷하다.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개혁을 외치던 노무현 정권 초기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재직하던 시절 박 회장으로부터 1억원어치의 상품권을 받은 혐의다. 이명박 정권의 초대 민정수석을 지낸 이종찬 변호사가 연루됐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 변호사의 경우 변호사 사무실 개업 당시 동생을 통해 박 회장으로부터 5억원을 빌렸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이 박 회장에게 빌린 돈을 갚은 시점이 이 변호사의 청와대 민정수석 임명 무렵이라 의혹을 사고 있다. 일부에선 검찰 고위 간부들이 연루됐다는 얘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둘째, 돈 살포가 매우 광범하고 일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최고 권력층의 도덕불감증이 그만큼 만연했음을 말해준다. 박 회장은 여야를 막론하고 돈을 뿌렸다. 노무현 정권의 실세였던 이광재 민주당 의원의 경우 네 차례에 걸쳐 2억원가량의 돈을 받은 혐의다. 이명박 정권의 ‘대운하 전도사’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에겐 비서실장을 시켜 2억원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미 구속된 이정욱 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과 같은 경우 안면이 전혀 없는 사이인데도 5억원을 선거자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검찰이 확인한 검은돈만 해도 수백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셋째,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연루됐다는 점이다. 노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의 경우다. 건평씨는 직접 돈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다른 정치인들에게 줄 돈을 대신 받아 전달했으며, 다른 당 소속 정치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검은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추부길씨 이외에도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연루됐다는 얘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문제의 심각성은 곧 엄정한 수사의 장애가 되기 쉽다. 벌써부터 야당에선 ‘표적 사정’이란 주장이 나오고 있다. 여당 내에서도 부산 지역 친박(親朴) 중진을 겨냥했다는 음모설이 퍼지고 있다. 박 회장이 노무현 정권 시절 실세였던 민주당 의원들과 가까웠고, 또 부산 지역에서 사업을 해왔던 점으로 미뤄 민주당 ‘386의원’과 한나라당 부산지역 의원들이 연루됐을 가능성이 큰 것은 당연하다. 뻔히 예상되는 부패 커넥션이다.

검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수사해야 한다. 2004년 정치관계법이 개혁적으로 바뀌었던 계기는 대선 자금에 대한 검찰의 수사, 그에 따른 국민적 비난 여론이었다. 이번에도 검찰은 부패상을 낱낱이 파헤쳐 국민 앞에 알려야 한다. 정권의 실세라고 해서, 검찰의 고위 간부라고 해서 칼날이 무뎌져선 안 된다. 그것이 검찰의 존재 이유이며 이 나라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