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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이공계 대학원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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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과학사는 우리에게 흥미있는 교훈을 던져준다. 유신 초기에는 소위 '오야토이(외국인 교수)'라고 불린 구미 과학자들이 선진국의 과학을 수입해 일본에 정착시켰다. 국가에서 풍성한 재정 지원을 받았던 도쿄공대의 경우 학장과 교수가 전부 외국인이었으며, 학생들은 학교에서 영어를 사용했고 양복을 입고 양식을 먹었다. 이곳 학생들은 졸업논문은 물론 일기도 영어로 썼다.

오야토이들이 배출한 초기 졸업생은 대부분 유학을 가 선진 학문을 더 공부했다. 이들이 돌아올 무렵 오야토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유학생을 포함한 일본인 과학자들은 연구를 계승.발전시켰으며 다음 세대 과학자들을 훈련시켰다. 20세기가 되자 이렇게 일본에서 교육.훈련받은 젊은 과학자들에 의해 국제적인 업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가오카라는 물리학자는 원자 모델로 '토성 모델'을 제시했으며, 데라다는 X-선 연구에서 국제적인 업적을 남겼다. 1920년께 일본 과학은 독자적인 연구 전통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똑똑하고 야심 찬 과학도는 과학 선진국으로의 유학을 꿈꾼다. 19세기 초엽 프랑스 파리가 세계 과학의 중심일 때 영국과 독일의 과학도들은 파리로 몰려들었고, 19세기 후반에는 거꾸로 유럽의 젊은 과학도들이 베를린에서 공부하기 위해 독일어를 배웠다. 20세기 초에 미국의 과학도들은 거의 대부분 독일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 한국의 뛰어난 과학도들이 하버드.MIT.스탠퍼드대로 유학을 꿈꾸듯이.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구미의 과학 선진국들이 모두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자국의 대학원에서 자국의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독자적인 교육이 다른 나라를 추월하고 난 다음이 아니라 그 전에, 즉 선진국의 수준에 아직 미치지 못했을 때 출발했다는 것이다. 독일은 프랑스를 추월하기 전에 독일 대학에서 세미나를 통해 학생들을 배출하기 시작했고, 일본도 아직 구미 선진국의 과학 수준에 훨씬 못 미치던 시절부터 유학보다는 자체 대학원을 육성했으며, 이는 20세기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한국의 대학원은 위기다.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많은 교수와 학생이 지금의 대학원 현실에 대해 비관적이다. 심지어 국내 대학원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수들도 우수한 학생들에게 "솔직히 유학가는 것이 너희 장래에 좋다"고 조언할 정도다. 국내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들은 '어차피 일류대학의 좋은 교수 자리는 유학생들 몫인데…'라고 자조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삼성과 같은 기업은 '안 돌아와도 좋으니 우리는 초일류 학생들을 유학 보낸다'며 유학을 지원하고, 정부도 인재 글로벌화를 외치면서 유학생 지원에 한몫 거든다.

성적이 가장 뛰어난 학생은 학부나 석사를 마치고 유학을 간다. 5~8년간의 힘든 유학생활을 마치고 좋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와 교수가 돼 실험실을 열 때 이들에게는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받아 잘 키워보고 싶다는 포부가 가득하다. 그렇지만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보는 롤모델(role-model)은 유학가서 좋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가 된 자신의 모습이다. 야심 찬 우수한 학생들은 선생이 밟은 길을 좇아 또 유학을 택한다.

'국내에서 암만 발버둥쳐도 선진국을 따라갈 수 있나. 그러니 차라리 유학을 가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과학사를 통해 보면 유학만을 계속 해서 선진국을 따라잡은 예는 한번도 없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아무리 유학을 가도 우리는 그들의 과학의 '일부'를 배워올 뿐이다. 지금이 국내 대학원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할 때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