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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시대]28.박정희 죽음과 핵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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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풍운아 박정희 (朴正熙) 는 어느날 홀연히 국민앞에 나타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의 극적인 삶과 죽음을 두고 일본의 한 정치인은 '하늘은 영웅을 냈다가 시대의 소임을 다하면 갑자기 거둬간다' 고 애도했다.

물론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민족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 지도자였는지, 민주주의의 자생적 발전을 가로막은 독재자였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은 여전하다.

그가 피살된지 26일로 18년. 그렇지만 김재규 (金載圭.사형.당시 중앙정보부장) 의 박정희 살해 동기에 대해서조차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군 검찰관으로 이 사건을 수사한 A (변호사) 씨는 김재규의 성격과 취향을 들어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증언. "김재규는 일본 사무라이 소설을 많이 읽어서인지 수사중 사무라이의 '앗사리한 자세' 와 '삶을 초개같이 버리는 생사관' 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욱 하는 성질에 당시 심각한 간경화로 매우 신경질적이었죠. 아버지의 묘소가 제왕이 날 자리라는 얘기도 있었고요. 수사과정에서 풍수지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디다."

이 설명은 金의 당시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시해 현장의 목격자였던 김계원 (金桂元.74)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당시 차지철 (車智澈.작고) 경호실장의 지나친 월권행위와 오만불손한 태도를 그 동기로 꼽았다.

운명의 그날 밤 궁정동 만찬장에서도 화제가 정치문제로 옮겨지자 김재규는 궁지에 몰렸다.

김계원의 증언. "朴대통령이 당시 국회에서 제명된 김영삼 (金泳三.70) 신민당총재를 구속 기소하지 않은데 대한 불만등을 터뜨리며 중정을 나무랐어요. 그런데도 김재규는 계속 온건한 정국 운영을 건의합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차지철이 '신민당이고 뭐고 까불면 전차로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라며 金을 공격했어요. 바로 그때 일이 벌어진 겁니다."

결국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누적된 불만이 한순간 폭발해 옆에 있던 朴대통령까지 살해하게 됐다는 얘기다.

10.26직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제1국장으로 김재규를 직접 조사한 백동림 (白東林.61.한국국민의식연구소 소장) 씨 역시 두가지 이유를 들어 10.26은 단순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처음 만찬장에 들어갈 때 평소와는 달리 권총을 갖고 들어가지 않았어요. 또 시해 직후 용산 육군본부로 차를 몰고 갔지요. 만약 치밀한 각본에 의해 결행된 사건이었다면 당연히 남산 중정으로 갔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차지철에 대한 불만이 朴대통령으로까지 비화됐을까. 박정희와 김재규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런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1917년생, 김재규는 1926년생이지만 육사 2기 동기생이었다.

고향도 같은 경북 선산군이었고, 술자리에서 부르는 '18번' 도 '으악새 슬피우니' 였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

두 사람의 성격을 잘 아는 김종필 (金鍾泌.71) 자민련 총재는 "김재규는 제 방귀소리에 놀라는 사람처럼 차지철을 죽이는 총소리에 놀라 엉겁결에 朴대통령을 살해했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김재규의 살해 행위가 계획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재규도 군 수사와 법정신문에서 "유신 이후 네차례 朴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 고 밝혔다.

80년 2월21일 강신옥 (姜信玉.61) 변호사에게 한 구술유언에서도 "자유의 물이 흐르는 강을 가로막고 있는 제방을 내가 제거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검찰관이었던 A씨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점점 그런 논리를 갖추어 가더라" 고 전하면서 "죽음을 앞두고 이름이나마 역사에 남기고 싶었을 것" 이라고 일축했다.

김재규의 주장과 행적 사이의 납득할 수 없는 괴리를 미국 개입설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미국 개입설이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퍼진 것은 10.26 며칠 전 김재규가 로버트 브루스터 미 중앙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A씨는 이 부분에 관심을 갖고 金을 신문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 "수사를 서둘렀기 때문에 충분히 파헤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金은 '시국 얘기를 한 것은 사실이나 朴대통령의 살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눈 적은 없다' 고 말했어요. "

미국 개입설은 당시 극도로 불편했던 한.미관계 때문에 더욱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76년 10월 박동선 (朴東宣) 사건을 시작으로 연이어 터진 미국의 청와대 도청 (盜聽) 사건, 특히 77년 1월 '인권외교' 를 표방하고 출범한 지미 카터 행정부의 인권개선 공방과 주한미군 철수 논란등이 이어졌다.

10.26 발생 20여일전 김영삼 신민당총재 국회제명사건에 대한 항의표시로 미국정부가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를 소환하면서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미국 개입설이 나돌자 글라이스틴은 "헛소리며 쓰레기같은 이야기" 라고 단호히 부인했다.

그런데 70년대 중반 합동참모부에 근무했던 한 예비역 고위장성 Z씨는 주목을 끌만한 증언을 했다.

"아마 78년 이후일 겁니다.

미군 고위관계자가 나에게 '박정희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며 '당신은 생각이 없는가' 라고 넌지시 묻더군요. " 70년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연구 책임자였던 과학자 X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76년 여름 CIA관계자가 '박정희를 사라지게 하면 어떻게 될까' 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냐' 고 반박했더니 '박정희가 사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물었던 것' 이라고 얼른 말을 바꾸더군요. " 이러한 증언들 역시 미국 개입설의 직접적인 증거는 못된다.

하지만 한국에 있던 미 CIA요원과 주한미군, 미대사관 관계자등을 통해 이런 유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더라도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미국은 박정희의 제거 내지는 하야 (下野) 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는 메시지를 던져주기에는 충분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재규가 1심 최후진술에서 박정희를 살해한 이유중 하나로 한.미관계의 회복을 언급했다는 대목은 흥미롭다.

그의 진술. "혁명 (그는 10.26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을 일으킨 목적은 혈맹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에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 "

그렇다면 미국은 박정희의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안들었을까. 예비역 장성 Z씨는 "70년대 중반 이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가장 큰 쟁점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 문제였어요. 카터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미 갈등이 첨예화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인권문제였지만 내면에는 핵문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그 무렵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Y씨는 "79년 6월 카터의 방한 당시 들어온 CIA요원 2백50명중 상당수가 귀국하지 않고 10.26까지 남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 말했다.

한국의 지도자는 국제사회에서 독자행보를 시작하는 순간 미국과 마찰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승만 (李承晩) 과 박정희.김영삼정권이 그 예다.

전두환 (全斗煥).노태우 (盧泰愚) 정권이 미국과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한 것도 미국의 입장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북아전략의 핵심에는 일본이 놓여 있으며 한국은 그 보호장치에 불과하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순간 미국의 대한 (對韓) 통제력은 사라지며, 일본도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핵무기를 보유하려 할 것이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결사 저지해야 하는 이유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당시 핵개발 관여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핵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기사가 나가면 나도 어떻게 당할지 모르지만 당신들도 다친다" 는등 대미 (對美) 공포증을 토로했다.

물론 기우일 수도 있다.

핵개발 과정에서 미국의 엄청난 시달림을 받으면서 생긴 피해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죽음을 미국과 연결시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박정희의 핵개발은 미국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폭발성 뇌관이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운명할 때까지 핵개발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당대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던 당시 핵심관계자들은 "있었던 사실을 없던 것으로 묻어 버리는 것은 역사와 국민앞에 죄를 짓는 것" 이라는 취재팀의 오랜 설득에 마침내 18년만에 입을 열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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