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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정권 10년이라면서 이전 정권 사람 데려다 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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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10면

김종인 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개각 때마다 이름이 거론됐던 경제부총리 단골 후보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손자라는 후광이나 비례대표 4선 의원이란 이색 기록보다 그의 이름에서 우선 떠오르는 게 1990년 5·8 조치다.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그가 주도한 이 조치는 부동산 투기를 막겠다며 비업무용 토지를 사실상 강제로 팔게 해 대기업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18일 오전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대한발전전략연구원을 찾았다. 그는 마침 쑹훙빙(宋鴻兵)이 쓴 『화폐전쟁』을 읽고 있었다.

김종인 전 장관, 이명박 정부의 경제위기 탈출 훈수

김 전 장관은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해 “절제를 모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적절한 규제가 없으면 자멸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며 “지금은 경기부양보다 힘들더라도 구조조정을 감내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윤증현 경제팀, 강만수팀과 다를 바 없어
-지금의 경제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위기의 원인부터 직시해야 한다. 10년 전 외환위기나 지금의 국제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은 비슷하다. 절제 없이 지나치게 외형만 키우다 거품을 만들었다. 돈이 교환과 매개의 기능을 떠나 상품이 돼 버렸고, 돈을 가지고 돈을 버는 산업이 계속 커지다 어느 순간 터져 버렸다. 이를 막고 시장경제가 절제 있게 움직일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게 정부의 역할인데 이런 점에서 소홀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했던 금융허브 정책도 방향을 잘못 잡은 건가.
“금융허브가 말처럼 쉽지도 않지만 진짜 됐다면 지금 영국과 아일랜드처럼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거다. 제조업이 위축된다면 먼저 왜 그런지를 찾아 보완하고 유지할 노력을 해야 한다. 남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금융허브 운운하며 외형 불리기에 치중하면서 경쟁적으로 해외 단기 금융차입에 나섰고, 이를 바탕으로 주택담보대출이나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늘리면서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아니냐.”

-현재 한국경제의 어려움이 상당 부분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이명박 정부는 운이 좀 없었던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상황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빠르게 하지 못한 실책을 저질렀다. 대선 때 어떤 얘기를 했더라도 취임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면 빨리 정책을 바꿀 줄 알아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다. 취임 후 국내외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는데 747 공약처럼 원래 계획했던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 건 큰 잘못이다.”

-시장에서는 새로 출범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등 2기 경제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전임 강만수 경제팀과 다를 게 없다. 이명박 정부가 사람을 선택하는 폭이 좁은 것 같다. 경제팀을 관료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찾았다. 읽어버린 10년, 좌파정권 운운하면서 전 정권에서 핵심 역할을 한 사람들을 데려다 쓰는 것도 모순이다.”
그는 금산분리 완화나 영리 의료법인 허용 같은 현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다른 뾰족한 경제정책이 없으니까 지엽적인 문제를 들고 나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기부양을 위한 부동산 규제 완화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 아닌가.
“(톤이 높아지며) 그게 참 우리의 고질병이다. 경기가 가라앉으면 경제관료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부동산을 적당히 요리해 경기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게 투기가 되고, 다시 투기 단속한다고 나서는 것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게 한국경제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한국도, 미국도 지나친 투기로 인한 거품이 터졌기 때문인데 또다시 반복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정운찬, 대통령감이라 생각해 출마 권유
얘기는 자연스럽게 1990년의 5·8 부동산 억제조치로 이어졌다.
-5·8조치가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대선 출마로 연결됐다는 말이 있던데.
“정 회장이 나중에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면서 내 이름을 거명했다. 그때는 부동산 광풍으로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투기로 인해 집세가 오르고 근로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수요처를 찾아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세 정책 등으로 정교하게 하는 방법은 없었나.
“선진국 어디에도 우리나라처럼 세금으로 부동산을 잡으려는 나라가 없다. 세금을 만병통치약처럼 쓰다가 노무현 정부가 저렇게 민심과 이반되는 현상을 초래하지 않았나.”

독일 뮌스터대 경제학 박사인 그는 70년대 서강대에서 재정학을 강의한 경제학자 출신이다. 그는 지금의 세제를 통렬히 꼬집었다. “우리나라는 74년 도입한 종합소득세와 76년 도입한 부가가치세(VAT), 이 두 가지가 핵심이다. 그런데 세수가 부족할 때마다 각종 서택스(Sur-tax·부가세)를 남발하면서 누더기 세제가 돼 버렸다. 도입 초기의 국민적 반발로 박정희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부가가치세는 건드려볼 생각조차 못한 채 다른 세금만 수도 없이 뜯어고쳤다.”

그의 비판은 계속됐다. “기본적으로 정당들은 세제에 대한 프로그램을 갖고 정권을 잡아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이런 역할을 기획재정부에서 해줘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야 종부세에서 보듯 정권이 하자는 대로 수동적으로 따라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잠시 화제를 돌려 정치 얘기를 물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대선 정국 초기 야권 후보로 거명됐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영입을 추진했다. 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 참모였던 김 전 장관과 서울대 교수들의 직선제 개헌 서명을 주도했던 정 전 총장은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만나 친해져 지금까지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강력한 대기업 규제 등 경제철학도 공유하는 일종의 동지적 관계다. 인터뷰 전날에도 그는 정 전 총장과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했다고 했다.

-정 전 총장 출마를 주장한 이유는.
“내가 17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들어오면서 계획이 있었다. 정치를 하겠다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대통령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쭉 생각해 보니 정운찬만 한 사람도 찾기 힘들겠다고 판단했다.”

-근거가 뭔가.
“경제 대통령, 경제 대통령 하는데 경제에 대해 그는 무척 해박하다. 서울대 총장도 제대로 했다. 정치 소질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사람이 굉장히 양심적이고 탐욕이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도 한번쯤은 탐욕이 없고 이익집단과도 무관한 사람이 됐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었다. 그래서 강하게 권고했는데 본인도 고민을 많이 하다가 결국 안 나왔다.”

-다음 대선 때 다시 추진할 수 있을까.
“글쎄. 본인이 결심해야 하는 문제지 다른 사람이 얘기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위기 때마다 “구조조정” 뒤엔 흐지부지
다시 경제 얘기로 돌아왔다. 그는 “경제 패러다임이 많이 변했다. 금융회사들이 전부 벤치마킹했던 씨티은행도 저 모양이 됐다”며 “지금 경제학자들도 아무 얘기 안 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은행법을 고쳐 위기극복 과정에서 한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 식으로 어떤 상황을 전제해 제도를 뜯어고치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한다. 물가안정에 경제안정 기능까지 맡으면 중앙정부 남대문 출장소로 되돌아가는 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경제안정 기능까지 맡는다면서 그린스펀이 저렇게 오만한 정책을 내놓아 금융위기가 초래된 것 아닌가.”

-외부 요인에 흔들리는 한국경제의 체질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한국경제가 70년대부터 10년에 한 번꼴로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구조조정 좀 해보려고 하다가 국제 여건이 호전되면 흐지부지 넘어갔다. 노태우 정부 시절 압축성장의 문제가 나타나 조정하는 시도를 내가 좀 했는데, 이해관계가 부딪쳐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들어 ‘신경제 100일’이란 걸 발표하면서 다 풀어준 뒤 과잉투자와 과잉부채 상황을 조장하다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때도 구조조정 좀 하다가 금방 경기가 살아나면서 흐지부지됐고 2001년 9·11사태가 터지면서 구조조정이란 말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미국도, 우리도 지금은 고통스럽더라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실직자가 많이 생겨날 것이다. 정부는 저소득층과 실직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더 촘촘히 구축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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