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정치권에 기대는 부실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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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근 정치권의 이전투구 (泥田鬪狗) 식 비자금 공방에 많은 기업들이 상당히 실망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경제가 또다시 정치 논쟁에 끌려들어가서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올들어 부도위기에 몰린 부실 기업들중 기업 스스로의 자구노력보다는 은근히 정치논리에 호소하는듯한 경우가 적지않았다.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표 이탈의 위험성' 이나, 지역성을 부각시키기위해 '특정 지역의 기업' 이란 점등을 은근히 정치권에 전달하려고 애쓰는 듯한 움직임이 자주 눈에 띄었다.

최근 부도위기를 맞은 쌍방울그룹도 같은 경우처럼 보였다.

쌍방울은 9일 뱅크오브어메리카 (B.O.A)에서 돌린 어음 90억원을 막지 못해 1차부도가 났다.

이의철 (李義喆) 회장은 다음날인 10일 오전부터 장시간 확대간부회의를 연끝에 급기야 같은날 오후3시 스스로 '최종 부도' 가 났다고 발표했다. 이날 회의에선 회사를 부도위기로 내몬 무주리조트의 매각이나 임직원 대폭 감축등 자구노력을 논의하기 보단 정치권에 화살을 돌리는 분위기였다는 것. 최근 신한국당의 비자금 폭로에 유태화 (劉泰和) 전 쌍방울건설 사장이 연루된 것으로 나온 것이나, 갑자기 해외 금융기관에서 어음을 돌린 배경을 정치논리로 해석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1시간도 안돼 B.O.A가 어음을 회수해 부도를 모면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쌍방울측은 "정치권이 우리를 버리지 못할 것" 이라며 기자회견 내용을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기업이 스스로 "우리는 망했다" 고 발표했는데 거꾸로 금융기관이 부도를 막아 준 셈이 된 것이다.

경제논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쌍방울측은 이처럼 분위기가 반전되자 11, 13일 주요 임원진 회의를 잇따라 열어 향후 대책으로 경영권을 고수할 수 있는 화의신청에 의견을 주로 모았다.

"이달에만 어음결제액이 3천억원이 넘는다.

쌍방울의 운명은 우리 손에선 떠났다.

민감한 시기에 우리를 죽이겠는가.

화의신청으로 대선 이후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 13일 쌍방울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정치논리에 기대를 걸고있는 듯한 자신들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이원호 <경제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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