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만들어 가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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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한국 국제정치학회가 발간한 최근 논총( 48집 4호)에 재미있는 논문이 수록됐다. 국제정치를 양자물리학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전통 물리학에서는 우주가 기계적으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그 법칙을 알아내는 것이 과제였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 원자 이하인 양자의 세계를 들여다 보니 그런 객관적 법칙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자 이하의 미립자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게나 양도 가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인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유령 같은 존재’ 라는 것이다. 특히 양자의 세계는 관찰되는 순간의 관찰자 의도에 따라 움직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영원불변의 객관적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도가 객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했다. 국제정치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가설이다. 국제정치에 과학적·객관적 법칙이 있다면 그 많은 학자 중 소련의 붕괴를, 9·11 테러를 어렴풋이라도 예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의 고질병은 아직도 좌와 우의 싸움이다. 보수의 눈으로 보면 사회는 보수의 논리로 돌아가고, 좌파의 눈으로 보면 진리가 좌 쪽에 있다. 이러니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미디어법 타결을 위해 국회에 사회적 기구를 만든다 해도 결국은 이 당파성을 떠날 수 없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이 신문을 보면 이게 진리 같은데, 저 방송을 보면 저게 진리라고 한다. 실험할 때 양자 물리학자들이 빛을 입자로 보고 싶으면 입자로 나타나고, 파동으로 보고 싶으면 파동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관점을 확대시키면 세상 모든 일이 어쩌면 자기 눈에 따라 사실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무슨 객관적인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며 현실을 창조하기까지 한다는 얘기다.

우리는 매우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다. 이 위기만 지나가면 될 줄 알지만 우리가 이 위기를 어떤 생각 속에서 통과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한국은 달라진다. 위기 이후 우리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의지에 따라 미래는 만들어 지는 것이다. 양자 이론처럼 관찰자의 믿음대로 세상이 현실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어야 한다. 환율과 성장률, 추경 예산액과 외환보유액도 중요하지만 그런 숫자를 넘어 위기 이후의 그림이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짓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 머릿속에 먼저 그림이 있어야만 한다.

공산주의도 실패했고, 자본주의도 위기를 맞고 있다. 더 이상 좌도 우도 의미가 없어지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는가. 자본주의를 인정하되 도덕성이 존중되고, 시장의 자유는 지키되 탐욕스럽지 않고, 경제적 효율성을 존중하되 사회 정의를 무시하지 않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현실적인 움직임도 보이기 시작했다. 강성 노조 민주노총에서 반성이 나오고, 현대중공업 임원들은 스스로 임금을 깎았다. 나는 이 위기 속에 좌우가 대타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본다. 미래의 한국은 우리가 그리는 그림대로 실현될 것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