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만두에서 깨우친 北 동포들 고통의 무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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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34면

지난달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온 이후 네팔의 모습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천혜의 아름다운 대자연과 시골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 그와 대조적으로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인 도시의 모습들…. 그러면서도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와 동네 사람들을 만난 것 같은 친근한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의 힘든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슴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5박6일의 안나푸르나 일정을 겨우 마친 나는 도시 관광 일정을 앞두고 ‘아, 이제는 살겠구나’ 하고 안도했다. 차를 타고 다닐 테니까 다리도 쉴 수 있고, 더운 물에 샤워를 할 생각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어찌나 행복했던지.

그러나 그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말라 죽은 어린아이의 시체를 본 것이다. 길가에 그냥 방치돼 있던 그 아이는 9살쯤 되었을까. 허리 위를 거적으로 덮어서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헐렁한 바지 속으로 앙상한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중앙시장 근처의 혼잡한 길이었는데 행인들은 무심히 지나쳤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대기오염과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서 수도 카트만두는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냈다. 도심 곳곳에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아이들, 온갖 종류의 장애를 가진 걸인들 사이사이로 걸어 다니는 관광은 차라리 고행에 가까웠다. 차선도 신호등도 없는 도로에는 차량들이 서로 먼저 가려고 쉬지 않고 경적을 울리며 뒤엉켜 있었다. 길가에선 여인들이 바구니에 각자 뭔가를 가져와 팔고 있었다. 여인들의 눈에서는 희망과 절망이 기묘하게 교차했다.

국민 80%가 힌두교도인 네팔인에게 희망은 내세적 개념일까. 그들의 현실은 10년간의 내전이 할퀴고 간 상처로 절망에 더 가까워 보였다. 다민족·다언어 국가였던 네팔을 수백 년간 통치해온 왕정(王政)이 3년 전 붕괴되고, 마오이스트 반군 지도자를 중심으로 성립된 연정 체제는 매우 불안정하다. 새로 집권한 사회주의 세력은 내부 권력갈등 때문에 나라의 기본 질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하루에 16시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경제발전은 요원해 보였다.

내전으로 파괴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지만 거기에는 일자리도 먹을 것도 없다. 부모를 잃고 떠도는 고아만 3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착하고 부지런한 네팔인에게 삶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8박9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절대빈곤을 몸소 체험한 나는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나 자신과 우리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너무도 다행스럽다. 내가 네팔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쯤 광주리에 채소 몇 개를 놓고 먼지 구덩이 길거리에서 저녁 끼니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내 아이는 거리를 헤매다 죽었을지 모른다. 카트만두의 풍경은 나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 만들었다. 어머니가 거지 아이들을 가끔씩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곤 했던 기억이 남아 있고, 한센병 환자와 상이 군인들이 나타나면 골목에서 놀던 친구들은 다들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우리네 1인당 국민소득은 지금 네팔의 수준(140달러)과 비슷했다.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매다 죽었을 네팔 아이의 다리가 자꾸 생각난다. 그러다 문득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북한 동포의 현실이라는 자각이 들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 다음 중국 동북 지방을 떠도는 탈북자들, 그리고 차마 믿기 어려운 꽃제비들의 처참한 생활상이 떠오른다.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주민의 키와 몸무게, 건강 상태는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떨어졌다.

탈북자들에게서 들은 이런 이야기들은 내게 아주 먼 나라의 끔찍하고 당혹스러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나의 무감각과 무기력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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