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국학자 이훈종박사의 추석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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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오곡 백과가 무르익어, 산야가 온통 풍요로움에 젖어, 마음마저 들뜰 그런 계절에 추석은 들어 있다.

농업사회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겠지만, 옛날엔 도시와 농촌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필자는 서울서 자라면서 송편 빚을 솔잎을 삼청동 뒷산에서 따다 드렸다.

하기야 종로 5가 효제학교 옆 방아다리 부근에서 배추를 밭떼기로 사다가 김장을 담그던 시절이니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농촌에서 추석 쇠는 정경을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담뱃줄 녹두말을 아쉬워 작전 (作錢) 하랴 장구경도 하려니와 흥정할 것 잊지 마소. 북어쾌 젓조기로 추석 명일 쇠어 보세. 신도주 (新稻酒) 오려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 (先山)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먹세. " 당시 담배는 줄로 엮어 말려서 매매하였고, 북어는 싸리가지로 꿰어 쾌를 지어서 팔았다.

또 조기는 흔할 때 사서 소금에 절여 두었다가 이 무렵 하나둘씩 낱개로 거래했다.

'아쉬워 작전하랴' 를 '하겠는가?' 로 보기 쉬우나 '작전할 겸' 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농촌에서는 모두가 자급자족이어서, 돈을 만질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기는 왜 안 사느냐고 하기 쉬우나 명절 때는 동네 안에서 잡아 분육 (分肉) 하는 것이 예사라 언급을 않은 것일 게다.

신도주는 햅쌀로 빚은 술이고, 오려는 올벼, 즉 일찍 나는 벼나락이니 역시 햇곡이다.

어느 한가지 신변에 아니 나는 것이 없다.

새옷을 입는 명절은 추석과 설뿐인데, 이 역시 집에서 짠 천에 자연산 물감을 들여, 남자 아이도 고운 빛깔 옷을 입었다.

자라는 아이라 두었다 내년에도 입으라고 크고 헐렁하게 지어 입히던 기억이 난다.

차례.다례 (茶禮) 상에 올리는 과일.다식 (茶食).산자이나 한과 (韓菓) 까지도 모두가 자가생산이요, 인심이 후하여 이웃엔 물론, 어려운 가정에는 넉넉하게 나눠 주었다.

달은 무엇보다도 이지러졌다가도 차츰 자라 꽉 차게 자라는 것. 이게 고마워 희망에 부푼 젊은 층에서들 복을 빌었다.

또 총각들은 달 뜨는 것을 맨 먼저 보아야 장가를 든다며,가까운 산등성이를 기어올랐다.

추석날 아침 차례를 지내는 것을 정점으로, 전날밤엔 온 가족이 마루에 모여앉아 송편을 빚으며, 마당에서 뛰노는 어린이들의 재롱을 즐겼다.

이튿날은 선산에 올라 산소에 바쳤던 제물을 내려 먹으면서 어른들이 들려주는 조상들 자랑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너무나 심하게 바뀌었다.

돈만 가지면 차례상을 차리는 것까지 대신해 준다니 조상이 계시다면 뭐라고 하실까?

나 자신 자연 속에 묻혀 드는 것이 아니라, 거북놀이.소놀이와 흥겹게 뛰고 도는 산대놀이도, 액자에 끼워 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펼쳐지는 강강술래도 무대예술로 변모하여서,가장 중요한 따뜻한 정을 찾을 길이 없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그 옛날 손에 손을 맞잡고 달아 달아 노래를 부르던 그 정서 되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 맨 끝의 장은 두번 겹쳐 부르는 것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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