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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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이예린 피디도 첫사랑을 중시할 만한 나이가 아닌 것 같던데…. 첫사랑이라는 관념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주장을 관철시키고, 또한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낼 자신이 그녀에게 있었던 모양이죠?"

모든 얘기가 결국 이예린이라는 인물로 귀결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도 그녀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했죠. 사실 이 피디의 말마따나 요즘 젊은 애들 중에 누가 첫사랑을 인생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겠어요. 막말로 사람에 대한 기억도 물화시키려고 덤벼드는 세상인데, 첫사랑이 얼마나 살 떨리는 경험이고 그것이 음으로 양으로 인생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걔네들이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런 얘깁니다. "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내 첫사랑을 모델 케이스로 삼아보고 싶다는 얘기인데…. 얘기를 듣고보니 더욱 난감해지는군요. "

미간을 찌푸리고 나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다 비벼 껐다.

"글쎄요, 이예린 피디가 이 작가님을 대상 인물로 선정하게 된 배경은 잘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협조를 해주시죠. 그 친구, 내가 보기엔 허투루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적당한 추측만으로 이 작가님을 섭외하려고 덤비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

"본인 얘기로는 내가 작년에 신문에 연재하다 중단한 소설을 읽었다고 하던데…. 동기야 어찌됐건, 재능과 의욕을 지닌 젊은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거절을 하려니 그것도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군요. "

"허어, 이작가님, 자꾸 이러시면 이 피디가 아니라 내가 직접 섭외하려고 나설 겁니다.

탐험 프로 만들면서 같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기억 안 납니까? 해발 1천7백미터에서 전복사고를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함께 살아난 사람이 부탁하는데, 그래도 안 들어줄 수 있겠어요? 하하, 이건 농담이고…. 아무튼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시간 나면 1995년을 회상하며 진하게 보드카나 한잔 하죠. "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소파에 길게 몸을 눕혔다.

이강현 차장과 주고받았던 말들, 특히 1995년의 기억이 기이한 환각처럼 잠시 허공을 부유하다 맥없이 스러져갔다.

그리고는 오직 한 가지, 나도 모르게 의식이 한 사람의 자연인 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예린이라는 방송국 프로듀서가 아니라 이예린이라는 젊은 여성, 그녀에 대한 관심에 미묘하면서도 날카로운 초점이 생겨나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예린이 아니라, 이예린이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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