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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테마별 고전읽기] 국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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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정치학에서 홉스는 '리얼리스트'로 통한다. 그는 국가의 출현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는 참 '쿨하게' 말했다. 국가는 짐승들 세계에 출현한 또 다른 짐승일 뿐이다. 하나님도 군자도 아닌 괴물, '리바이어던'(한승조 옮김, 삼성출판사)이 그것의 참된 형상이다.

괴물인 국가. 하지만 정치사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그의 견해가 더 괴물 같았다. 그는 국가와 자연(본성)에 대한 고대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었다. 서구의 오랜 자연법 전통에 따르면 '자연상태'는 우리 본성에 일치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다. 현자들은 자연상태 속에서 모두가 따라야 할 모범을 발견하며, 국가는 신민들을 그곳으로 이끌려고 한다.

하지만 홉스가 기술하는 자연상태는 정반대다. 그것은 욕망과 충동이 지배하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상태다. 거기서는 힘이 권리이고, 물리학 법칙이 유일한 법이다. 제한된 재화를 차지하려는 늑대와 늑대의 싸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국가의 목적은 이런 끔찍한 전쟁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데 있다. 국가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 자신이 다른 짐승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짐승이며, 두려운 전쟁상태를 끝낼 수 있는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국가의 위압적 힘 아래서만 자신의 자연권을 양도하고 안정적인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참으로 거침없는 발언이다. 고상한 이념이나 지고의 선(善)이 아니라 국가 폭력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니. 게다가 국가의 기원이 야만적인 전쟁상태에 있다니.

하지만 그가 정말 국가 이미지의 전복자이고 국가 기원에 대한 폭로자일까. 불행히도 나는 그를 대단한 위선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국가의 기원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국가에 대한 근본 물음을 봉쇄하고 있다. 그는 국가가 없다면 끔찍한 전쟁과 혼돈이 찾아올 것이라고 겁을 준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국가에 반항하거나 국가에 의문을 표하는 것을 금한다. 도대체 이 괴물은 어디서 왔으며 그 정체는 무언가. 이 괴물에게 정말 우리 자신을 맡겨도 좋은가.

홉스에게선 모든 것이 적나라하지만 딱 한 존재만이 신비하다. 모든 늑대들이 자연권을 포기했지만, 딱 한 괴물만이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물을 수 없다. 홉스는 말한다. 국가의 공포가 아니면 전쟁의 공포를 막아낼 수가 없다고. 전쟁을 상상해보라고. 자유를 자제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나는 홉스를 리얼리스트라고 부르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을 볼 때조차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푸코가 잘 지적했듯이 그의 전쟁은 "피도 시체도 없는 일종의 재현 게임"이다. 국가는 적의 야만성, 테러의 공포를 끊임없이 상상케 함으로써 자신의 야만과 테러를 감추어 버린다. 전쟁과 테러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킴으로써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테러리스트의 야만성을 시청케 함으로써 자신의 침략전쟁과 테러를 못 보게 한다. 그래서 나는 홉스식 전쟁이 사실은 실제의 전쟁을 은폐하기 위한 가짜 전쟁이고, 홉스가 말한 권리의 양도가 양도되지 않는 권리를 은폐하는 가짜 양도라고 생각한다.

진짜 쿨한 리얼리스트였던 니체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는 괴물이 아니라 "온갖 연기를 피우며 시끄럽게 짖어대는 한 마리의 위선적 개에 불과하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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