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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칼보다 정'에 사는 검객…갈피마다 비수 같은 문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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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천자의 나라 상.하
김유인 지음, 오두막, 각 350쪽 안팎, 각권 9500원

"사랑하는 마음이여 봄꽃과 다투어 피지 마라/한 조각 그리움은 한 줌 재가 되리니"

표지에 이런 글귀가 실렸다. 척 펴보니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 하나, 그렇게 울고 있었다."(244쪽)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어째 아름다운지, 왜 우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하던 이 소설을 읽은 윤구병 전 충북대 교수가 그냥 두기 아깝다며 출판을 주선했다는, 그러면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보다 뛰어나다고 추천한 이 대중소설을 그렇게 만났다.

북송 인종 시절을 배경으로 한 역사추리물이다. 평범한 황제였던 인종은 치세 중반부터 어질고 똑똑한 정치를 펼친 현군으로 변신했다. '경력(慶曆)의 치(治)'란 전성기를 이뤘다고 한다. 무슨 계기가 있었을까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여기에 중국 시경(詩經)에서 당시(唐詩)까지 훑어 골라낸 아름다운 시들이 소품 이상의 역할을 한다.

주인공은 전조, 바로 판관 포청천에서 수사관으로 활약하는 그 검객이다.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인종은 가면을 쓰고 민심을 살피러 저잣거리로 나섰다가 전조를 만나 그의 됨됨이에 호기심을 느낀다. 마침 북리 군왕부에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밝혀내러 떠나는 전조와 동행하며 겪는 이야기다.

가짜 아들이 나오고, 아리따운 여인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패도적인 야심가, 야비한 무사,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은 이민족 지도자도 등장한다. 음모가 중첩되고 피 튀기는 싸움도 벌어진다. 그러면서 인종은 참다운 군주로 깨어난다는 스토리다.

▶ 중국 고전소설 '칠협오의'에 실린 전조.

당연히 인피면구, 직도황룡, 이형환위 등 낯선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사람의 얼굴가죽을 벗겨 만든 변장도구,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검법의 한 초식, 몸을 날려 한순간에 위치를 마음대로 바꾸는 경신술이란 뜻이란다. 이거 무협소설인가. 심드렁해질 만한데 눈을 뗄 수가 없다.

땅이 팔리면 전호도 팔린다는 수전전객같은 당시 제도나 당나라 시인 이상은, 서하 초대 황제 이원호 등에 대한 각주들도 소설답지 않다. 걸리적거리기도 하련만 술술 읽힌다.

권선징악의 통쾌함 때문도 아니고 주인공의 막강한 무위(武威)에 대리만족을 느껴서도 아니다. 여느 무협소설 주인공과는 사뭇 다르게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협객 전조의 인간성이 매력적이고, 인종이 지도자로서 눈 떠가는 과정이 그럴 듯해서다. 꼬여만 가는 부자관계, 이루기 힘든 사랑, 우직한 사나이들간의 의리가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무엇보다 갈피마다 숨어있는 보석 같은 문장들이 흡인력을 발휘하고, 작가의 메시지가 상당한 공감을 자아낸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더라도 적은 있기 마련이고, 의견의 차이가 곧 인품의 차이는 아니지요. 중요한 건 오히려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45쪽)

"부모란 말일세, 자식에게 늘 미안하다네. 자식은 부모가 죽은 뒤에야 그 사랑을 깨닫고 절절해하지만, 부모는 살아있는 동안 내내, 그리고 죽어서도 아린 생인손 보듯 자식을 대하지."(243쪽)

"법은 너무 공평무사해서 인정이라는 것을 담아 두지 못합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저 판결만 내리지요… 조금만 더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97쪽)

이런 구절들이 그렇다.

2001년 포털사이트 다음의 포청천 팬카페에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열성 독자가 곧 따로 전용 홈페이지를 만들어 줄 정도로 인기를 모았단다. 정식 등단도 않은 30대 후반의 이 작가가 어떻게 신세대의 입맛을 사로잡은 처녀작을 썼을까 궁금했다.

만나 보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대학 시절 김용 작품으로 '무협세례'를 받았고 잡지 기자, 방송작가로도 활약하면서 영화시나리오 공모에도 당선된 글쟁이였다. 그러다가 "생명을 가벼이 여겨 칼질 한 번에 수 백명씩 죽어 나가고 여자들이 남자 주인공의 장식품 노릇이나 하는" 기왕의 무협소설이 못 마땅했단다. 해서 강한 것이 곧 정의가 아니라 바른 것이 정의임을 보여주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니 주인공 전조의 입을 빌어 "사람들은 강하면 뭐든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약한 자가 어찌 사는지, 힘만 앞세우는 세상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강하지 않아도 세상에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많은지 다 잊고 삽니다."란 비판을 했을 터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지적 깊이는 '장미의 이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추리소설의 핵심인 반전의 묘미도 약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달리는 것도 느껴진다. 그런데 일단 책을 들면 놓을 수 없다. 사실(史實)과 상상력으로 엮어낸 재미에 자연스레 녹아든 문제의식, 명징한 문장의 매력이 만만치 않아서다.

작가는 "독자들이 행복하게 읽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랬다. 숨가쁘게 읽고 나서 뿌듯했다. 가볍지 않은, 그러나 탁월한 이야기꾼을 만나서.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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