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박찬호 현상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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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박찬호 (朴贊浩)!

오! 박찬호!

야구가 뭐길래 박찬호는 우리의 영웅이 됐단 말인가.

박찬호가 던지는 볼 하나 하나에 우리의 운명이 걸려 있는 듯이 손에 땀을 쥐고 텔레비전 앞에 모여드는 그 많은 사람이 모두 야구에 미친 야구 매니어일 수는 없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변화구가 뭔지도 잘 모르고 텔레비전 아나운서가 스트라이크라고 하니까 잘된 줄 알고 숨을 내쉬는 정도일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박찬호는 우리의 영웅이 됐을까. 간단히 말한다면 박찬호는 영웅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영웅이 없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충무공.김구 (金九)…역사에 나온 훌륭한 인물들은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우리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비극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대성공' 을 이룬, 천하를 휘어잡은 알렉산더나 카이사르, 나폴레옹이나 링컨 등과는 성격이 다른 인물들이다.

더욱이 지금 살아 있는 인물은 없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한심하게만 보이고 민족의 경험과 서정을 글로 포착한 민족의 대시인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왜소하게만 보이는 우울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찬호가 우리의 영웅으로 일어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박찬호는 학연.지연.특혜.정부의 대책위원회.수출금융.고위층과의 줄같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이익독점의 그 어떤 수단도 동원하지 않고 오히려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나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한 참으로 '깨끗한 성공' 의 가장 대표적인 예다.

박찬호가 우리의 영웅이 된 이유는 그밖에도 또 있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꺼리지만 사실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소위 선진국, 특히 미국에 대한 깊은 콤플렉스가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들의 문화에 저항하면서도 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미국의 대중문화를 비판하면서도 동족이 미국사회에서 인정받을 때 우리 국민과 재미동포의 대다수는 그야말로 흡족한 대리만족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고전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한인 소프라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심지어 플레이보이 잡지에 누드모델로 등장한 한인여자를 광고모델로 삼기까지 한다.

그러나 박찬호의 능력은 박찬호에 속한다.

민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대리만족은 이해할 수 있지만 박찬호의 성공이 우리 민족의 성공일 수는 없다.

또 그의 실패도 우리 민족의 실패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천재는 개인에 속한다.

어느 집단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다.

끝으로 박찬호 현상은 우리 사회의 '성공모델' 이 다양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전통사회에서의 '성공' 은 관직을 의미했다.

'춘향전' 의 메시지가 바로 그렇다.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사회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크게 달라지고 있지만 성공모델은 전통사회의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부모는 자식들이 '공부' 를 잘해 관직이나 또는 이와 유사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를 바란다.

그 결과로 교육은 입시경쟁에 의해 지배되고 사회는 안정된 직업구조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의 독점체제로 굳어 버리고, 정치는 기득권의 독점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며, 경제는 시장의 자유로운 기능을 봉쇄하기 위한 각종 규제와 개입으로 경쟁력을 상실하게 돼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기에 바로 박찬호가 우뚝 솟아 오른 것이다.

그의 성공은 전통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현상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을 전통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어야 할 때가 왔다.

부모가 생각하는 성공만이 성공이 아니라 아이들은 자신들의 성공의 기준과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권한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박찬호의 성공은 민족의 성공이라기 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의 성공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경원 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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