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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 병역시비 옹호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달 가까운 이회창 (李會昌) 후보 아들의 병역시비를 보면서 나는 결과적으로는 이 시비가 李후보 개인이나 우리 사회를 위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리라는 낙관적 기대를 한다.

나는 사실 그의 정치가로서의 '대쪽' 이미지를 싫어한다.

대쪽이라는 게 뭔가.

한 칼에 내려치면 텅빈 속을 확 보이면서 쪼개지는 게 대쪽이다.

풍진세파가 휘몰아치는 오늘의 정치판에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복잡한 세상사에서 대쪽처럼 곧고 학처럼 고고하게 살 바엔 아예 정계입문을 하지 않는 게 옳다는 입장이다.

세상사 저변을 꿰뚫어 보면서 인내와 포용력으로 이 사회의 갈등과 문제점을 풀어 가기 위해선 때로는 포커 페이스가 돼야 하고 때로는 강철 같은 심장으로 시련을 이겨 나가는 뚝심도 있어야 한다.

그의 대쪽 이미지가 이번 병역파동으로 깨졌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서 명문학교를 나와 세상살이 어려운 줄 모르고 살았을 출세한 엘리트로선 이번 시련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법대로 했다 해도 믿지 않는 불가해한 민심의 동향도 파악했을 것이다.

인내와 포용력도 배웠을 것이다.

정치가로서 숙성 (熟成) 하는 시련의 한 고비였을 것이다.

지지율 몇 %가 떨어졌다고 낙담할 게 아니라 한 정치가로서 거듭나는 플러스 요인으로 자기평가를 할 일이다.

무릇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이번 병역파동 저변에 흐르는 민심의 이상기류를 파악해야 한다.

지도층사회에 대한 민심이반 (離反) 현상이다.

지난 17일자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에 이런 기사가 났다.

병역파동 이후 달력의 12월18일 (대통령선거일) 자 밑에 '잊지 말자 이회창씨 아들 건을!' 이라고 적어 두는 한국주부들이 많아졌다는 보도다.

이들이 이처럼 격분한 것은 문제의 아들이 출세한 엘리트집안 출신이기 때문이고 가난한 집안 아들이었다면 진작 용서했으리라는 한 국내정치학자의 논평까지 붙이고 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이는 한 후보의 지지율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지도층 전체에 대한 총체적 불신과 적개심이 병역문제를 기화로 표출된 적신호라고 판단했다.

대통령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정전반에 개입한 사례나, 수조원의 은행돈을 빌려 쓴 졸부 아들이 외국도박장에서 수억원의 돈을 날리는 작태를 보면서 국민들은 상류층 전체에 심각한 불신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층에 대한 국민불신이 이렇듯 높아서는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없다.

지도층의 기강을 잡는 노력을 최고지도자의 의지와 정책으로 보여줘야 한다.

왜 '박정희 향수' 인가.

그는 집권중 병역기피자의 공직임명을 철저히 차단했다.

공직자의 재산상황을 내사했고 분에 넘치는 집을 지녔으면 경고친서를 보냈다.

지금 정부안에 이런 분위기가 남아 있고 이런 식의 점검과 불이익을 주는 장치가 제도적으로 작동되었다면 지도층에 대한 불신이 이렇듯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사문화의 잔재라고 치자. 그러나 누가 대통령이 되든 윗물을 맑게 하는 의지와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병역파동은 반면 (反面) 교사로서 교훈을 준다.

이 교훈을 잘 따를 때 병역시비는 나라 바로세우기의 긍정적 요인이 된다.

기왕 불거진 병역문제라면 차제에 총체적 점검을 해야 한다.

한 후보의 상처내기로 끝내지 말고 이 사회의 형평성에서 문제점이 발견된 이상 대안제시를 해야 한다.

권영해 (權寧海) 안기부장이 육군소장 시절 '우리나라 병역의무 형태에 있어서의 형평문제' 라는 연구서를 발표한 적이 있다.

법률적으로, 현실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현역병과 면제자간의 비합리적 격차를 어떻게 해소하느냐는 게 이 연구서의 요지다.

그가 제시한 보충역의 최소화와 복무기간의 단축, 병역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기업체의 임용방식 개선, 상비군을 줄이고 예비역을 늘리는 이스라엘식 동원체제 등은 새롭게 논의할 대안이다.

여기에 군 처우개선과 하사관제 확대도 검토할 만하다.

한 후보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 병역문제를 시비할 게 아니다.

잘난 인사들의 허물을 들춰 카타르시스적 만족을 얻기 위해 남을 매도할 일도 아니다.

병역의 형평이 잘못됐다면 효과적 장치로 개선하는 게 민주시민사회의 역량이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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