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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죽음을 넘어서는 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괌에서의 대한항공기 추락사고로 2백26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평생 일밖에 모르다 뒤늦게 일가족을 거느리고 여행길에 올랐다가 유명을 달리한 이, 내년 결혼식을 앞두고 여행을 떠났다가 불귀의 객이 돼버린 커플, 아버지 병구완에 애쓰던 어머니를 위로하겠다던 효녀들…. 그 모든 이의 꿈과 사랑이 니미츠힐에 묻혀 버렸다.

블랙박스의 해독작업이 멀잖아 끝나면 추락원인, 의문의 저공비행을 하게 된 이유가 나올 것이다.

사고원인이 밝혀지면 그에 따른 대책이 세워져 이후의 사고방지에 보탬이 되기는 하겠지만 한번 세상을 떠난 이들의 삶을 되돌려주지는 못한다.

느닷없는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결별해야 하는 남은 이들의 설움은 그래서 클 수밖에 없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는 게 우리의 정서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흔적을 애써 남기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흔적 남기기' 는 얼굴사진이다.

고고 (呱呱) 의 탄성을 지르며 태어난 순간부터 필름에 노출되기 시작하는 우리들은 죽은 후에도 영정사진으로 명맥을 이어 간다.

이런 문화 탓일까. 작게는 생일파티에서 여행지에 이르기까지 렌즈에 각자의 얼굴만 담기 바쁘다.

유명관광지에서 함께 놀러 온 사람들이 똑같은 위치에서 사람만 바꿔 가며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들이다.

서양사람들이 빼어난 경치나 유물, 민속과 생활상을 담느라 셔터를 눌러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괌 대한항공기 사고현장에서 여당의원들의 기념사진 촬영' 건도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같은 우리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편린에 다름아니다.

대한항공기 사고현장의 기념사진촬영을 둘러싼 비난과 변명의 기사를 접하면서 나는 그들이 사고현장을 둘러보며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궁금해졌다.

과연 그들은 비행기의 잔해를 사진으로 남기는 데도 열심이었을까. 사건관계자들과의 면담기록은?

일전에 아는 분이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내가 세상에서 받은 가장 값비싼 선물" 이라며 검정색 하드보드로 된 다이어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여름방학동안 캐나다의 친지에게 다녀온 아이의 손에 들려 전해졌다는 그 다이어리에는 주부의 글씨체로 7월18일부터 한달간에 걸친 아이의 생활이 하루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이 흐릿해질 것을 염려해 다이어리에 등장하는 각 인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곁들여 놓았다.

예컨대 '매카시 : 12세. 백인으로서 크리스와 동기동창으로 키가 1m75㎝가 넘어 아빠보다 크다.

크리스와 10년 친구' 하는 식이다.

심지어 일기에 지하철역이 나오면 '정문과 후문이 있는데 우리집에서 후문은 1분 거리이고 정문은 3분 정도 걸린다' 라고 주석을 달기도 했다.

"덕분에 한달간 우리 아이가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훤히 알 수 있겠더라" 며 찬사를 거듭하는 그를 보고 내실 (內實) 보다 현시 (顯示)에만 급급한 우리의 생활문화가 떠올라 씁쓸했다.

만약 캐나다의 그 주부가 유명관광지나 그곳 친구들과의 기념사진만 예쁘게 장정해 보내 줬다면 아이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사람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자녀를 남기는 것과 책을 쓰는 것" 이라고 움베르토 에코는 말했다.

책이란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전해지는 하나의 기록이다.

이제부터라도 얼굴찍기에만 열중하지 말고 기록하는 습관도 길러 나가도록 하자. 단 한줄의 메모라도 쌓이면 훌륭한 기록이 될 수 있다.

프랑스인 다게르가 노출시간을 1~5분으로 단축해 인물촬영을 가능하게 한지 올해로 1백56년. 지하에 잠든 그가 '한국인들의 얼굴찍기' 열풍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홍은희 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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