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빚어낸 또 다른 즐거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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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와 탁자만 있으면 자동차가 뚝딱 만들어진다. 단출한 무대를 채우는 것은 배우와 관객의 상상력이다. 사진은 '39계단' 연습에 한창인 배우들.

(사진) 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내가 가면, 툭. 당신도 가는거지, 퉁.”
 “(해니에게 끌려가며)안 돼요, 툭. (뒷발질로 자동차 문을 차며), 퉁”
 자동차 문을 여닫을 때마다 4명의 배우들이 입으로 ‘툭, 퉁’ 효과음을 낸다. 이를 지켜보다 웃음이 터진 스태프와 달리 배우들은 여전히 진지하다.

 6일 남산창작센터. 21일 개막을 앞둔 연극‘39계단’ 연습이 한창이다. 지난해 9월 국내초연한 이 연극은 나른한 일상을 보내던 해니가 우연히 살인사건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히치콕의 동명영화로도 알려진 작품이다.

 무대는 단출하다. 100분간의 공연에 143개의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배우는 고작 4명이다. 남자 주인공인 해니(이석준·박해수 더블캐스팅)를 제외한 나머지 배우가 적게는 3개(정수영)에서 많게는 각각 70개(임철수·홍태선)에 가까운 역할을 소화한다. 남자가 여자로 분(扮)하는가 하면 허리 굽은 노인이 예리한 스파이로 순식간에 변신하기도 한다. 캐릭터 변신에 걸리는 시간은 단 10초. 한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역할의 순서를 바꾸는 실수가 있지 않느냐는 우문에 멀티맨 홍태선은 현답을 했다.

 “몸이 알아서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장면의 전환이 빨라 배우들의 호흡도 중요하다. ‘고개를 돌리는 타이밍까지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는 게 협력연출 임영조의 말이다.

 소품도 단순하다. 문짝 하나로 수많은 문을 통과해 들어가야 하는 대저택을 표현한다. 헬리콥터 추격 장면은 스크린과 그림자로 완성된다. 긴박한 추격전이 펼쳐지는 기차는 나무 상자로, 평탄치 않은 길을 달리는 자동차는 의자로 족하다.

 최소한의 소품으로 만들어지는 공간과 상황에 사실감을 불어넣는 것은 배우들의 몫이다. 기차 위에선 배우들이 옷을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흔들어 추격전을 실감나게한다. 장애물을 건널 때엔 몸을 위로 살짝 띄운다. 또 몸을 전후·좌우로 움직여 자동차의 좌·우회전과 급정거를 암시한다. 그러다보니 배우들의 체력 소모가 적잖다.

 “20대인 다른 배우들과 달리 나이가 많아(30대 후반) 힘들다”고 너스레를 떤 이석준은 “오브제를 최소화하고 배우들의 힘으로 만드는 무대란 점에서 가장 연극적인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물인 데다 라이선스 작품이 갖는 한계를 지난 초연에서 톡톡히 경험한 탓에 이번 연습이 홀가분하진 않다.

 “단어부터 말투까지 세밀하게 수정하는 중”이라는 임 연출은 “상황과 상황, 장면과 장면이 변화되는 흐름 자체로 재미를 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관객을 얼마나 웃기느냐에 신경 쓰다보면 망가지는 작품이다. 웃기고 싶은 배우의 욕심을 참고, 기발한 상황 설정으로 차원이 다른 웃음을 주겠다”는 게 이석준의 다짐이다.

 ‘상상할수록 즐겁다’는 홍보 문구처럼, 단출한 무대를 꽉 채우는 건 관객이 얼마나 자유롭게 상상하느냐에 달렸다.
21일~3월 29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평일오후 8시, 토요일 오후 3·7시, 일요일 오후 2·6시. 1만5000~3만5000원.
▶문의= 02-2250-5900


프리미엄 김은정 기자 hap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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