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수환 추기경 선종…"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51년 사제품을 받고 난 후 김수환 추기경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한국 가톨릭의 거목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 선종(善終)했다. 87세. 선종이란 가톨릭에서 임종할 때 성사(聖事)를 받아 대죄(大罪)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김 추기경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지난해 8월29일부터 서울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해 6월11일 조촐한 생일파티가 세상에 공개된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후 끊임없이 위독설이 나돌았고 수차례 고비를 넘겼다. 최근에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졌다.

김 추기경은 생명연장 장치를 거부해왔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의료진이 매일 응급 처치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올 때면 “대속(代贖ㆍ남의 죄를 대신해 당하거나 속죄하는 것)할 일이 남아 있어 주님이 나를 살려두시나 보다”며 담담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1922년 5월 8일(음력)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거쳐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대주교가 됐다. 이듬해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이자 세계 최연소 추기경의 탄생이었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천주도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98년 정년(75세)을 넘기면서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1944년 압력에 못 이겨 지원해야 했던 학병 시절 (앉은 이는 전석재 신부)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했을 때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봉사하는 교회’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를 주문했다. 이후 핍박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곧 관심을 가졌다. 독재와 불평등한 현실에 대해서는 강경 발언도 불사했다.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성직자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그는 1970년대에는 정치적으로 탄압 받는 인사들의 인권과 정의 회복을 위해 팔걷고 나섰다. 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회는 오랫동안 정치권력에게 배제 당했지만 결국 천주교회의 지위는 격상됐다.

김 추기경은“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장애인과 사형수, 철거민과 빈민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기구로 설립, 소외된 이들을 돕는 서울대교구의 복지시설을 늘리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장면

최고의 종교 지도자였지만 스스로를 늘 부족하다고 여겼다. 99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70평생을 회고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책을 2권 펴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다.

이들 산문집에는 “가톨릭 최고의 성직자로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며“예수와 닮은 사제로서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기 성찰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웃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지 못함으로써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했다”고 반성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당시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과 사태를 겪으면서 인권사회 정의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며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내 심경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털어 놓았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김 추기경의 사목 표어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 길을 제시해온 김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를 넘어선 대한민국의 정신적 지주였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