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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의 이명박, 2009년의 이명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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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는 그때 지도자의 비전과, 그걸 이뤄낼 애국적 의지와 실천적 능력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줄리어스 시저가 세계사의 위인으로 기록된 건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사통팔달하는 도로망을 구축하고 간척사업과 수로개발을 하고 토지·조세 개혁과 공직자 윤리법 제정으로 국가의 토대를 확고히 다져 놓았기 때문이다. 국가 통치자는 과거를 보면서 오늘을 통치하면 되지만 국가 경영자는 100년 후를 내다봐야 한다.”

지도자와 함께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도 꼬집었다. “긍정을 모르고 부정만을 고집하는 민주투사와 교수·학자들의 요구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좌절됐다면 우리 경제, 우리 발전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9일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서울 대중교통 체계를 개혁할 당시를 회고하며 “내가 비난과 여론에 밀려 원칙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처칠·케네디·대처를 거명하며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부정적 사고로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명확한 원칙을 갖고 긍정적인 사고로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져 왔다”고 말했다.

어쩌면 안 바뀐 정도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견고해진 듯하다. “당장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뚜벅뚜벅 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간의 경험이 확신과 자신감을 주는 요인일 게다. 1998년 정계를 떠난 그는 미국에 체류하며 선진 정치를 체험했다. 이후엔 서울 시정을 이끌었다.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으로서 1년간 국정을 운영했다. 누가 뭐래도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알고 가장 깊게 고심하는 사람이다. 대통령 주변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대통령”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더라도 경계할 게 있다. 자신감은 오만과 동전의 양면이다. 확신은 자칫 독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유(類)의 전언도 제법 있다. 최근 이 대통령을 만났다는 한 여권 핵심 인사는 “어떤 얘기를 하든 다 대답이 있더라. 마치 철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청와대의 한 실무자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수치를 제대로 못 외우는 실무자는 엄청 깨진다. 대통령은 혼내며 자신이 제일 많이 안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해당 분야에서 수십 년간 일한 우리가 의당 더 많이 알지 않겠는가.”

그가 귀에 못 박히도록 들은 얘기겠지만 또 해야겠다. 아무리 전속력으로 달리더라도 귀는 열어놓아야 한다. 숨이 차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대화해야 하고, 근처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땐 멈춰 잠시 기다리는 모습도 보여야 한다.

이 대통령의 눈엔 4대 강에 맑은 물이 넘실대며 흐르는 게 보일 거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기업들의 호령도 들릴 게다. 시골 기숙공립학교를 나와 명문대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의 포부도 느껴질 게다.

이런 청사진을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하면 할수록 미래는 더 풍요로워진다. 추진력과 아이디어를 얻고 문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니 결국 생산적인 일이기도 하다. 과거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처럼 위기 극복 세대란 자부심을 나눠 가질 기회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에게 달라지라는 건 아니다. 13년 전의 그는 지도자의 덕목 중 하나로 국민과의 호흡을 꼽았다. “국민을 고객으로 모시고, 고객을 왕자(王者)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나랏일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서울시장 때 몸소 실천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가 부쩍 속도를 내면서 국민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질까 우려돼 하는 얘기다.

고정애 정치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