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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와 진보 연결시키는 건 최악의 편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0호 22면

진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찰스 다윈이 세계 지성사에 확신시키는 데는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윈은 종교계는 물론 다양한 반대진영의 공격을 받고 있다. 다윈의 지지자들은 자연선택론이 잘못 이해되고 인용되고 적용되고 있다고 억울해한다. 그를 법정에 세워 직접 신문해 보자.

다윈의법정

▶검사=진화론을 주장하면서 인간만은 신의 영역으로 남겨 두었다면 굳이 당신이 이 자리에 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쉬운 질문부터 하지요.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유래했다면 왜 아직도 원숭이들이 남아 있지요?
-다윈=150년이 지나도 이렇게 스스로 무지함을 드러내는 질문을 한다는 게 정말 답답한 일이군요. 우선 진화론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과 원숭이의 조상이 같다고 주장할 뿐이지요. 마치 검사님의 질문은 “아이가 어른에게서 유래했다면 왜 아직도 어른이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아요. 원래의 종(種)은 새로운 종의 운명과 아무런 상관없이 영속할 수도 멸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검사=화석은 진화론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화석은 진화의 기록을 연속적으로 보여 주지 못하지요. 도대체 그 ‘잃어버린 고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윈=화석 기록이 매우 성기게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화석이 형성되고 발견되기가 그만큼 어려운 까닭이지요. 하지만 고래의 진화에서 확인된 중간 화석은 지금까지 적어도 여덟 단계가 있어요. 인류 진화에도 최소한 열두 단계의 중간 화석이 있고요.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화석만이 유일한 증거가 아닙니다. 현대의 분자생물학은 DNA 안에서 진화의 증거를 속속 찾아내고 있습니다.

▶검사=‘열역학 제2법칙’은 ‘세상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함없이 진행한다’는 게 요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진화론은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죠.
-다윈=열역학은 제 전공이 아닙니다. 하지만 검사님의 말씀은 확실히 틀렸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의 전제조건은 ‘닫힌 계’라는 것입니다. 즉, 드나드는 에너지가 전혀 없는 곳에서나 들어맞는 이론이죠. 하지만 생명은 닫힌 계가 아닙니다. 태양은 생명을 이어나가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에너지를 공급하지요. 게다가 생명이 없는 계에서도 무질서로부터 질서로 가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모래 둔덕, 토네이도, 종유석, 번개가 바로 그런 예지요. 만일 무질서로부터 질서로의 이동이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것들이 자연계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일까요?

▶검사=사실 당신 이론의 문제는 과학 바깥에 있어요.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2권을 당신에게 헌정하려고 했더군요. 또 인종차별주의가 당신의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다윈=항상 이런 식이더군요. 진화론은 과학이론입니다. 그런데 논쟁은 항상 정치 또는 이념적인 것으로 흐르고 맙니다. 공산주의자가 중력을 인정한다 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위험한 이론이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닙니다. 다만 제 이론을 잘못 적용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은 ‘진화’와 ‘진보’라는 개념을 같은 것으로 보는 오류를 저질렀고, 이것이 우생학이나 사회적 다윈주의로 악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물의 구조를 표현할 때 절대로 ‘고등’이나 ‘하등’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화와 진보를 연계하려는 사상이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최악의 편견이거든요.

▶검사=피고, 우리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당신은 ‘진화론’을 주장한 것에 대해 죽기 전에 회개했다지요?
-다윈=나는 마음이 가장 크게 흔들렸을 때조차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였던 적은 없었소. 아마 나이가 들어갈수록 불가지론자가 돼 갔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입니다. 다만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아내 에마를 존중했기에 종교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는 일을 자제했지요.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회개했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1915년 미국 침례교 잡지가 퍼뜨린 유언비어죠.

▶검사=끝으로 묻겠소. 당신은 진화론을 믿습니까?
-다윈=나는 진화론을 ‘믿지’ 않습니다. 단지 지구가 수십억 년 전에 생겨났고 생명이 장구한 세월 동안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수없이 많거든요. 과학에는 믿음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증거에서 의미 있는 추론을 이끌어 내는 활동이지 종교가 아닙니다.


이정모 교수는

연세대에서 생화학을 공부하고 독일 본 대학에서 생태유기생화학을 전공했다. '해리포터 사이언스''바이블 사이언스' 등을 썼다. 안양대에서 과학사, 과학기술과 문명 등의 과목을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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