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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짚기>청와대의 건축공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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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쩔 수 없이 건축공간의 영향을 받으며 삶을 엮어나간다.

예컨대 측간과 화장실은 배설이라는 동일한 본질적 기능을 갖는 공간이나 그 공간의 위치가 집 밖과 안이라는 차이 때문에 그 공간 속에서의 삶의 형태가 그 이름만큼이나 다르게 되었다.

부부가 살면서 서로 닮아간다는 것도 오랜 세월동안 같이 산 건축공간의 영향이 자못 크다.

공중도덕심이 결여된 사람도 호텔의 으리으리한 로비에서는 침을 뱉지 못한다.

또한 수도자들이 고요하고 검박한 장소를 택하여 도를 닦으려 하는 것도 그 좁은 공간에 그의 삶을 의탁하고 지배당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건축은 인간이 만들지만 또한 우리의 삶의 모습은 그 건축공간의 영향을 통해 바뀌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공간은 눈에 보이지않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 중요성을 곧잘 간과하기 쉽지만, 우리의 모든 갈등구조는 주의깊게 살펴보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는 건축과 공간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허다하다.

예를 들어 정치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영역과 공간의 확보에 관한 문제로 볼 수 있다.

전제주의 국가의 공간은 주군이 항상 앞에 앉고 다음 계급들이 그 직급에 따라 질서있게 배열되는 형태이나, 옛날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신봉한 그리스의 정치공간은 원형으로 둘러앉는 토론과 타협의 공간형태를 가졌다.

오랫동안 우리를 우울하게 한 파행적 절대권력의 정치형태도 그러한 전제적 건축공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그 파쇼적 공간에서의 삶은 경직된 까닭으로 끝내는 부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정치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각종 정치공간을 원형테이블로 바꾸는 등 가시적으로 민주적 공간으로의 변모를 꾀한 적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전제적 형태의 공간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아래 우리의 근대사 자체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순 뒤 우리가 목격하게 된 것은 경복궁 너머 준수한 북악산의 풍경 아래 위치한 청와대의 모습이다.

이곳은 일제가 조선왕조를 폄하하고 유린하기 위해 경복궁과 도성을 내리깔아 보도록 총독관사의 터로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의 중심축을 움켜진 이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면, 공간에 지배당하는 인간인 바에야 어느 누군들 오만해지지 않으랴. 더구나 몇년전 그 건축 외관마저 시대를 역행한 봉건왕조시대의 사이비 건축형식으로 새로 건립된 지금의 청와대 건축과 그 공간은 그속에서 사는 이들로 하여금 리얼리티를 직시하게 하기가 몹시 어렵게 되어 있다.

아무리 선하고 겸손하며 시대의식이 있는 이라도 이런 곳의 건축에 오랫동안 지배당하는 삶을 사노라면 필경 전혀 다른 사고와 행동을 갖게 되리라는 것은 가설만은 아닐 것이다.

이곳에 거처했던 대대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좋지 못한 말로를 가진 것도 그 증좌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다우닝가나 엘리제궁이나 백악관 등이 그 도시의 중심축에서 비켜서서 시민과 같은 눈 높이에 있는 까닭으로 저들은 탄탄한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높이에 있는 청와대의 봉건적 건축은 언제 우리 시민의 눈 높이로 내려와 이 시대 우리의 건축 모습으로 있게 될까. 믿건대 우리와 같이하는 그런 건축공간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라면 우리를 떠날 리가 없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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