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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열전>4. 시인 김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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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으실으실 허네. 올 겨울은 춥겠구만….”헐렁한 한복차림으로 쭈그려 앉은 그가 스산하고 씁쓸한 '가래 굵직한'목소리로,예의 그 험한 얼굴 표정을 일순 누그러뜨리며,야윈 어깨를 짐짓 추스르며, 그렇게 깡마른 온 몸을 신음 반(半) 흥얼중얼 반으로 소리를 내뱉었을 때 이시영(시인,그보다 8살 밑이다)은 그 어리숙한 얼굴 표정을 마구 펴면서 감탄,찬탄했다.“허,시인이야 어허….” 80년대초 김지하의 원주 집에 놀러갔다가 해지는 것을 셋이 망연자실 바라보던 때의 일이다. 그렇게 시인의 모습으로 보일 때 후배시인을 찬탄시킬 정도로 김지하는 시인 이상,혹은 이외의 것으로 알려져왔다.“허 족장의 가을이로고….”그 몇년후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어떤 마당극 공연에 대한 김지하의'소감'은 그랬다. 가래가 더 끓고 더 무겁게 가라 앉았다.그렇다.그는 소위 '운동권'에서 더 큰 오해를 겪었다.

그와 마음이 가장 잘 통하는 사람은 아마도 소설가 이문구.둘은 동년배인데 서로 전혀 다르므로 서로를 포괄하는 사이이다.오랜 수형생활 후 이문구와 재회했을 때 김지하는 반가운 시늉으로 그를 얼싸안더니 슬쩍 머리를 어루만졌다.그리고 매우 흡족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흘렀다.이문구의 머리가 김지하보다 더 벗겨져 있었던 것.그렇다.그는 여전히 젊은 채로 속세로 돌아온 거였다.

“지하형,요샌 정말 변했어….”몇 년 전부터 후배들이 그렇게 심심찮게 술주정을 해대면 나는 대답한다.“그 형이 안 변해서 문제지 변해서 문제인 사람이냐….”사실 세상이,아니 운동권 일부가 그에 대해 시끄러운 것은 90% 이상 변화 자체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그의 생명사상이 정말 언제부터인가?“어느날 갑자기 벽이 다가들어 오고 천장이 자꾸만 내려 앉기 시작하였지요.감옥에서는 이를 벽면증(壁面症)이라고 합니다.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손가락도 무던히 깨물었어요…그때가 마침 봄이었는데…바로 그것을 보았습니다.개가죽나무란 풀이었어요…웅크린 채 소리 죽여 얼마나 울었던지!…그저'생명'이란 말 한마디가 그렇게 신선하게,눈부시게 내 마음을 파고 들었습니다.”(김지하'생명과 자치'중). 이게 바로 민주화운동의 투사로 그가 신화화되던 1970년대 후반 께 이야기이다. 그는 육영수 살해범 문세광이 갇혔던 특수감옥에 있었다. 좌우 옆방는'보안상'비어 있었다.그 오른쪽 옆이 내 방,나는 집시법 위반범으로 갇혀 있었다.그가 교도관을 좌우로 거느리고 바깥 나들이를 하던 날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를 불렀다가는 그 삼엄한 보안-호위대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았다.행렬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나는 겨우'김영일씨!'하고 그의 본명을 뒤늦게 불렀다.

그는 가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는데,그때의 그 형형한 치명적인 눈빛! 저 눈 빛을 다시 만날수 있을 것인가.그도 나도 기약이 없었다.그를 다시 만난 것은 약 7년후 시집 '타는 목마름 으로'가 출간된 직후였다.

나는 징역 2년 꽉 채워 살고 곧바로 강제징집,군대 3년 치르고 제대,졸업하고 문단에 데뷔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퇴직하고,그렇게 밀렸던 원 한꺼번에 치르고 결국은 실업자로 눌러 앉는지 2년 째 되던 해였다.이시영에게 전화가 왔다.

“너,바쁘나?”“바쁘긴 형은 실업자 놀리나….”“그러면 너 김지하 술상무 좀 할래?”“뭐라,술상무?” 전국 도하 각지에서 술꾼들이 창작과 비평사로 몰려 드는데 출판사로는 감당이 안되다는 거였다.어쨌거나 그렇게 나는 김지하를 다시 대면케 되었는데 그는 검고 삐적 마른 채로,그리고 간간히 신경이 곤두 선듯한 채로,거대해 보였다.그는 술에 찌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질탕한 술고래라기 보다는 밤을 새우며 불면증과 함께 독한 술에 자신을 조금씩 그리고 철저히 파먹히는 거였다.“갸가 잠을 통 안 자서 어떤 때는 무서워….”작년에 돌아가신 그의 부친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해장비결은 물경 10단계.마를 갈아 먹는 것,그리고 간장 참게게장을 거쳐,생쌀을 물에 불려 갈아 마시는 것'에 이른다.그는 평소 말이 없지만 한번 시작하면 남의 끼어듦을 허락하지 않고 말하는 중에 자기 생각을 대체로'스무가지'로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니 글의 문제는 대체로 스무가지,첫째…둘째….”미리 정리된 것이 아니건만 그의 나열은 일목요연했고 빈틈이 없었다. 송기숙(소설가)은 그 스무가지에 휘말려 진땀을 뻘뻘 흘렸던 경험이 있다.나는 열여덟 번'예'하고 딱 두 번 '아니오'했다가'이 스키,말 되게 많네'그런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내 후배 김사인(시인,평론가)은 그와의 첫 대면에서 마냥 존경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다가 느닷없이 예의 그 스무가지 핀잔을 듣다가 거꾸로 격분,그에게 몸을 날렸다.김지하의 스승 김윤수(미술평론가)가 말렸기 망정이지 난처하고 광포한 꼴이 날뻔했다. 각설 하고 요는 그러할때, 그가 남을 질타할때 사실 그는 환청에 시달리며 자신의 정신을, 그'명료함'을 혹사하며 더 명료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다.몸과 마음과 정신이 평온하고 고요한 날,그는 평생 그러고 싶었던 사람처럼 자상해진다.

나는 90년대에 그에 대해 두번 놀랐다.거리를 지나는데 내가 인사를 하자 그는 나를 못 알아보았다.그게 한번.그리고 몇 년 후 신경숙(소설가)이 무슨 상을 받던 자리에서 나는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으로 알고 피했는데 그가 뚜벅뚜벅 걸어와 내 손을 붙잡으며 이러저러한 근황을 물었다. 그렇게 두번이다.그는 두 번의 필화를 당했다.

70년대 필화는 신화적이고, 그렇게 우리를 한데 묶었다.또 하나는 현실적이다.분신자살 중지를 촉구한 한 신문 기고문은 민중운동권 일부의 김지하 책 불매운동을 불렀다. 나는 후자의 경우가 감옥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더 아팠다.누가 누구를 비난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김지하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왔을 뿐이다.

생명의 본질인 고요,고요의 외형인 파란만장을 확대. 심화하면서 크다,여리다.때로 거창하고 그렇게 가다보면 간혹 부황하다. 그 사이 속,틈의,공(空)의,예술의 무한대(無限大)색,생명에서 생명으로 왔을 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열렬한 신봉자,그리고 반대자를 모두 갖고 있다. 나는 신봉자는 아니지만 그를 일러 딱 한마디 탄식하고 싶다. 아,나를 포함해서 이땅의 시인들,왜 김지하처럼 안 사는 것일까!

김정환 시인.한국문학학교 교장

<김지하 그는…>

'대자유인'이란 말이 가장 적확하게 그 짝을 찾은 인간 김지하(金芝河). 어디에도 갇히기 싫어 온 몸, 온 정신과 혼으로 펄쩍펄쩍 뛰며 그가 저항하고 있는 것은 반생명(反生命)이다. 바람에 날린 민들레 꽃씨가 제 뿌리 내리고 싶은 곳에 뿌리 내리듯 자연의 생명에 어긋난 제도와 사회에 시로,사상적으로,또 행동으로 저항하며 金씨는 우리시대의 대자유인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金씨는 66년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69년 문예지 시인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金씨는'황토''타는 목마름으로''애린1' '중심의 괴로움'등의 시집과'생명''옹치격''생명과 자치'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63년 대학시절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첫 투옥됐던 金씨는 69년 반공법 위반,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80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박정희시대를 투옥과 수배를 피한 잠적으로 보내야 했다.

이 도피와 투옥이라는 부자유가 역설적으로 자유와 생명이 진하게 묻어난 金씨의 시와 사상으로 발전된 것이다. 김정환(金正煥,43)씨는 김지하씨가 석방된 80년 이후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후배시인으로서 대자유 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보호'하며 그 혼을 배우려하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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