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황장엽의 전쟁위험 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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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전북한노동당비서 황장엽(黃長燁)씨가 망명 5개월만에 공식기자회견을 했다.이 회견을 통해 그동안 궁금증을 자아냈던 몇가지 의문이 분명히 밝혀졌다.그의 망명동기는 진실로 무엇이었던가,그가 말하는 북한의 전쟁준비상황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그리고 이른바'황장엽 리스트'의 실체는 무엇일까였다.

첫째,더 이상 의심을 가질 수 없을만큼 그의 망명동기는 진솔했고 분명하다는 사실이다.트로이 목마설이나 나치독일의 헤스역(役)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제기됐지만 이번 회견으로 이런 의혹은 사라졌다고 본다.96년초부터 김정일(金正日)체제의 강화와 함께 일기 시작한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실망과 환멸을 느낀 나머지 전쟁노선포기와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려 했다는 그의 진술이 웅변적으로 그의 망명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둘째,국민 누구나 가장 관심깊게 주시하는 부분이 그가 말한 북한의 전쟁준비상황이다.비록 그가 군관계 업무에 종사하지 않았지만 당비서라는 고위직에서 오랫동안 듣고 본 그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고 신뢰성이 높다.통일조국 대통령을 바란다는 김정일은 6개월내 남침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으로 전쟁물자를 6개월분만 비축하고,서울에 5~6분동안 미사일 방사포등을 쏘아 잿가루로 만든 다음 일본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위협으로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겠다는 구체적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는 진술이다.

우리는 黃씨의 전쟁위험경고를 들으면서 우리의 대북(對北)경계심리를 한층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우리 모두 전쟁의 위협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거나 그럴리가 없다는 지나친 낙관론에 젖어 있다는 반성을 해야 한다.특히 정정(政情)이 혼란할 때가 남침의 호기라는 그의 지적은 후보경선을 앞두고 혼전을 벌이는 여당지도자들에게 맹성을 촉구하는 대목이다.

물론 黃씨의 경고가 자의적이거나 지나치게 과장됐다고는 보지 않는다.군과 보안당국은 이 경고가 얼마나 현실과 부합되는지 각종 정보.첩보활동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기자회견에서 밝힐 수 없는 자세한 군사기밀도 있다고 본다면 그의 경고는 경고 이상의 현실적 위협일 수도 있는 것이다.더욱이 우리 군은 지난 강릉 잠수함침투사건으로 전력(戰力)의 허점을 국민앞에 노출시킨 적이 있다.전쟁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국방력의 재점검이 시급하고 방첩활동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억지력은 군사적 대응만으로는 불가능하다.군사적 대응 못지 않게 우리가 강화해야 할 부분이 북한의 개방유도정책이다.교류와 협력이 전쟁을 막는 매우 확실한 무기고 북의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주는 방식이다.특히 최근 북한은 김일성(金日成) 3년상을 끝내고 후계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긴장분위기에 휩싸여 있고 식량난으로 더할 수 없는 위기감에 몰리고 있다.'굶어 죽느니 차라리 전쟁을'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실정이다.고조된 긴장을 더욱 자극하기보다는 풀어주는 쪽으로 기능하는 것이 교류와 협력이다.

전쟁위험을 줄이는 또 다른 장치가 미국과의 연합방위체제 강화와 주변국들간의 연대를 통한 북한 어루만지기다.4자회담이란 결국 북한의 전쟁위험을 줄이면서 대화와 협력관계로 끌어내자는 또 다른 전쟁 억지방책이다.어떤 형태의 전쟁이든 남북간 충돌은 쌍방간 돌이킬 수 없는 파국밖에 없다.교류.협력.개방유도가 군사력 못지 않게 가장 확실한 전쟁위협 차단장치임을 黃씨 진술을 통해 우리는 다시 확인해야 한다.

黃씨 망명과 함께 제기된 관심사항이 이른바'황장엽 리스트'였다.그는 이에 대해'고첩 5만여명'이나 리스트 같은 것은 언급한 적도 없고 제시한 적도 없다고 했다.다만 그와 접촉했던 남쪽사람은 있었음을 시인했다.자칫 정치적 파문으로 번질 수 있었던 사안이 이로써 봉합된 것은 다행이지만 위법적 접촉을 한 인사가 있다면 접촉경위와 내용을 수사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업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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