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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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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존 윈스럽은 흔히 '최초의 위대한 미국인'으로 꼽힌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들을 이끈 정신적 지도자다. 케임브리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청교도적 소신을 고수하다 법관에서 쫓겨났다. 1630년 종교적 신념을 구현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향한다.

그는 스스로를 구약성경의 모세로 생각한 듯하다. 신대륙행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대탈출(Exodus)이며, 자신을 믿고 대항해에 오른 청교도는 이집트를 탈출하는 유대인 노예였다. 그는 모세처럼 역사적 순간을 기록했으며, 선상의 무리에게 설교했다. 그 일기는 미국 역사의 출발점이며 설교는 미국 정신의 주춧돌로 평가된다.

신대륙은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 새로운 나라는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 즉 예루살렘의 재현이어야 했다. 언젠가 그들이 떠나는 낡은 나라, 구대륙을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는 지난 주말 타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가장 즐겨쓰던 표현 중 하나다.

레이건 대통령이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집권 두달 만에 터진 암살 기도다. 1981년 3월 정신이상자의 흉탄이 대통령의 심장 직전에서 멈췄다. 생명을 건진 레이건은 복음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 "창조주에 의해 구원받았다. 앞으로의 삶은 그분의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의 리더십엔 이런 종교적 신념이 깔려 있다.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부른 것도 종교적이다. 실제로 소련이 붕괴하기까지 레이건은 무력 사용(그라나다 침공)을 포함한 모든 노력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케네디와 달리 흉탄을 이겨냈고, 카터와 달리 악의 세력을 물리쳤다. 윈스럽의 건국정신 이래 뿌리 깊은 미국인의 소명의식을 성취한 대통령이다. 그의 마지막 길에 추모 열기가 뜨겁지 않을 수 없다. 11일 워싱턴 대성당의 추모 예배로 공식 장례행사가 끝난다. 그 추모 행렬의 선두에 '악의 축'과 싸우는 부시 대통령이 있다. 그는 레이건이 8년간 같이 일했던 부통령의 아들이자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레이건은 떠나도 그의 정신은 남아 있다. 미국의 자존심과 소명감이다.

오병상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