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 '회장실'과 지주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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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카를 슈미트(1888~1985)는 히틀러의 반(反)유대주의에 이론적 뒷받침을 만들어 주었던 정치사상가다.“적을 규정하는 것은 내부적 자아(自我)를 규정하는 첫 걸음이다.누가 당신의 적인지 내게 대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대주겠다”고 그는 말했다.적을 가지지 않으면 자기도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 인간의 공격적이고도 불합리한 실존(實存)인지도 모른다.한국에는 적을 규정한 두개의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어 왔다.하나는'반공(反共)'이고 다른 하나는 좀 엉뚱하게도'반재벌(反財閥)'이다.

반공은 한국에서는 국시(國是)로까지 극대화해 반공법이라는 특별 형법마저 제정됐었다.남한의 적(敵)은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권력만으로 족했을 것인데,중국.러시아.동구 제국까지도 적으로 삼고 있었다.그러나 실제로 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겨냥했던 적의 범위는 남한 내부의 공산주의자만이었음은 물론이다.

한국의 정치가.관료.지식층.언론은 노선의 좌우는 달라도 반재벌에 있어서는 대체로 일치해 왔다.반공법은 80년 폐지됐지만 90년 전면 개정된 공정거래법에는 지주(持株)회사 설립금지 조항을 더 명백히 하는등 반재벌주의를 일층 강화했다.세계에서 지주회사 설립이 금지돼 있던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다.재벌이 2차대전의 전범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우리는 덩달아 일본법을 본받은 것이다.금년에 일본은 지주회사를 합법화했다.

한국에서 재벌이 탄생할 수 있게 한 환경으로는 무엇보다 수입규제와 수출장려를 꼽을 수 있다.수입대체 산업은 관세.비관세 수입장벽을 통한 보호를 받았고 수출산업은 그 어려운 금융에의 접근이 가능했다.이 혜택은 국내의 어떤 수입대체산업.수출산업기업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이 지나간 날의 혜택을 차별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외국의 정부와 기업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들 가운데서 실력을 쌓은 기업들이 규모가 큰 새 사업에 진출하는데 있어'정부 허가'를 획득할 때 생겼다.이 단계에서 차별적 선택이 일어났다.정부 허가야말로 특혜였다.이런 새 사업은 대체로 또 다른 수입대체산업 아니면 수출산업이었다.거기서는 다시 무차별적 혜택이 주어졌다.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과 같은 덩치 큰 기업 그룹이 태어났다.

정부는 자신의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도 환경으로 일조(一助)해 생겨 난 재벌을 전두환(全斗煥)대통령 때부터 지금까지 때려 오고 있다.재벌이라는'적'을 규정함으로써 자기네 정권과 관료조직의 정당성과 유능함을 창출.확대하려고 한 것이다.

재벌은 효율성이 없기 때문에 미구에 쓰러지고 말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국경제 전체가 공멸하게 된다는 명분을 세우기도 했다.'전문업종'만 남기고 다른 사업은 정리시키려고도 해 보았다.'전문 경영자'에게 경영을 넘겨야 된다는 생존전략을 강요하기도 해 보았다.

이젠 세계무역기구(WTO) 출현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수입대체와 수출산업에 주던 무차별적 혜택은 없어졌다.몇가지 산업에 대한 과잉경쟁 구실을 단 정부의 진입규제만 없애면 차별적 특혜도 없어진다.반재벌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모두 사라지고 있다.그러자 정부는 최근 재벌회사 때리기의 새 종목으로'회장 비서실'폐지를 들고 나왔다.

기업 그룹의 회장 비서실은 그늘에 숨은 지주회사다.그러므로 회장실을 없애되 지주회사를 합법화한 다음 없애도록 해야 한다.회장 비서실이 지주회사로 바뀌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다른 주주의 권한이 회장 비서실의 존재 때문에 희생되는 일을 없애자는 것이다.오랫동안 논란되고 있는 재벌회사 연결재무제표 작성의무 문제도 지주회사의 재무규칙에 삽입하면 해결될 것이다.재벌그룹 기업만이 아니라 다른 공개회사에서도 주주총회 권한이 대주주 1인의 그것을 대신해 신장돼야 한다.

재벌의 존재는 한국경제의 진화론적인 생명 특징 가운데 하나다.이 특징이 소멸한다면 그것도 진화에 따라 이뤄지는 현상일 게다. 강위석 논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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