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계의휴양지>알래스카 크루즈여행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알 래스카 동남부 연안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10년동안이나 표류했다는 신화속의 지중해를 닮았다.그가 신의 저주를 받아 헤맨 지중해는 프랑스의 시인 장 그르니에가'지중해의 영감'에서 노래했던 아름다운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내해가 아니었다.성경속에서 바울이 디모테오에게'겨울이 되기 전에 오라'고 일렀던 혹독한 바다였다.

피요르드(침식해안)를 이루며 이어지는 북미대륙의 서쪽 끝자락을 바라보며 북상하는 뱃길.극지로부터 비껴내려온 차가운 바람에 낯을 씻긴 해안선은 짙은 안개에 감긴채 그 윤곽만을 드러낸다.순간순간 눈앞에 드러났다 사라지는 바다사자와 고래무리를 끝없이 따라 날며 바닷새들의 날개짓은 원시와 신화를 함께 털어낸다.

알래스카의 여름해는 늦게 진다.힘이 다한 저녁해가 수평선에 이마를 찧을 때,사람들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지를 의심한다.침묵속에 넋을 적신채 차고 날카로운 수평선에 눈을 베인 사람들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석양은 온통 핏빛이다.그러나 그들도 그날 오후 두개의 무지개가 그려낸 천국을 보았으리라. 노아가 방주에 올랐을 때부터 항해는 인간의 숙명.갑판 가득 어둠을 실은채 몇개의 불빛으로 발밑을 비추는 8만급의 강철선박은 그저 배일뿐,고행하는 성자처럼 말수를 줄인 영혼들의 무게는 바다로 기운다.

환히 불을 켠 선실과 극장.카페.레스토랑과 카지노,그리고 추억의 중심을 꿰뚫으며 길게 이어진 상가의 풍경들.바다를 내다보는 레스토랑의 선미쪽 테이블에는“빈방 있습니까”라고 묻던 영화'남과 여'의 주인공 장 루이 트랭티냥의 목소리가 묻어 있다.

파도는 새벽에 거세다.쉴새없이 내리는 빗속에서,멀리 지나치는 얼음조각들은 푸른색 솜뭉치같다.빙산은 거대한 신음을 토해내며 빙하협곡에서 몸을 떼어내 검은 바다속으로 몸을 던진다.글래시아 베이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는 가이드는 하와이 마우나 케아에서 왔다.

검은 화산암 절벽이 과묵한 풍경을 그어내린 모퉁이를 돌자마자 곤두선 단층이 하늘 끝에 닿아 세상의 끝을 열어 보인다.밴쿠버를 떠난지 나흘,글래시아의 아침풍경은 빈병에 담아보낸 유년의 꿈을 열어보기엔 적당치 않다.정연한 침묵 속에'나'와 풍경이 한 이름으로 겹쳐지는,오직 끝없는'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주의!격정을 꿈꾸는 사람이라면,갑판에 담요를 덮고 누워 시시각각 변해가는 하늘빛과 끝없는 고독에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배에 오르지 말라.알래스카에서는 쓰디쓴 차를 나누며 이방인과 나누는 대화조차 진공속인듯 아련한 먼곳에서 영감처럼 밀려온다. 크루즈 십 갤럭시호에서=허진석 기자

<사진설명>

만년설로 뒤덮인 알래스카 동남부 해안의 산악을 바라보며 해안을 따라 끝없이 여정을 재촉하는 크루즈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빙하협곡 순례.원시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은 글래시아 베이의 풍경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