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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음력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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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한국인의 쇠고집 가운데 하나가 음력설을 쇠는 것이다. 1873년 양력을 받아들인 일본은 설날을 양력으로 쇤다. 하지만 양력설은 일본설이란 고정관념이 있어서일까. 1896년 갑오개혁 때 양력을 수용한 한국은 지금도 설날만은 음력이 대세다. 1912년 양력을 채택한 중국에서도 춘제(春節·설)란 말은 당연히 음력설을 가리킨다.

여기서 양력이란 그레고리우스력을 말한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 이집트의 태양력을 바탕으로 만든 율리우스력을 1582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고친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주기가 365.2422년이라 윤년이 필요한데 율리우스력은 무조건 4년에 한 번씩 이를 두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2000년에 15일 정도 오차가 생긴다. 그래서 4의 배수인 해 가운데 100의 배수인 해는 윤년에서 빼고, 400의 배수가 되는 해는 윤년으로 놔두는 방법으로 오차를 바로잡은 것이 그레고리우스력이다.

그레고리우스력은 현재 글로벌 스탠더드다. 하지만 공공생활에선 이를 사용하면서도 종교나 민속 등에선 고유의 달력을 사용하는 국가나 지역·집단이 숱하다. 무슬림(이슬람교도)은 하지(성지순례)나 라마단(금식월)을 비롯한 종교 행사를 이슬람력에 따라 하고 있다. 유대교도들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지역에서도 동방정교권은 종교 생활을 율리우스력에 맞춰서 한다. 해당국 정부는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였지만 각국의 동방정교 교회 가운데 이를 수용한 곳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종교 축일은 옛날 달력인 율리우스력을 따른다. 다만 1923년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에서 만든 ‘개정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곳은 꽤 있다. 역법은 그대로 쓰되 그해 10월 1~13일을 달력에서 삭제해 그레고리우스력과 날짜를 맞춘 것이다. 이렇게 하면 2800년까지 두 달력은 똑같아져 가톨릭·개신교와 같은 날에 성탄절을 축하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크·그리스·키프로스·루마니아·불가리아 정교회가 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러시아·세르비아·마케도니아·그루지야·폴란드 정교회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해당 교회 신자들은 1월 7일을 성탄절로 쇤다. 이날이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같다고 달력까지 같지는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정권 때까지 역대 정부가 양력설 쇠기를 강요했지만 ‘설날은 음력으로 쇤다’는 도도한 대중 정서를 바꿀 수는 없었다. 게르만족 이동 때보다 많다는 2000만 명의 귀성객이 불과 사나흘의 짧은 기간에 거주지와 고향집 사이를 기꺼이 고생스럽게 왕복할 정도로 극성스러운 게 한국인 아닌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정성이다. 중국은 춘제 때 수억 명이 움직인다지만 이동이 한 달쯤에 걸쳐 이뤄지니 서로 비교할 수 없다. 명절이면 만사 제쳐놓고 고향으로 달려가고, 가족끼리 모이는 것은 한국인의 DNA 속에 귀소 유전자가 들어 있기 때문일까.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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