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우체국장님의 부자유친 - 7년째 자식사랑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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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하숙집에 들렀더니 TV에서나 볼 수 있는 군화같은 신발이 눈에 띄더구나.내 아들이 이런 신발을 신다니….그 자리에서 화를 낼까 하다 못본체 했다.재수하느라 지친 네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잠시 유행하는 신발을 산 것이겠지.…아버지는 너를 믿는다.매사에 충실하고 건강해라.” 몇년전 50대 아버지가 재수하는 맏아들에게 보낸 편지다.대학입시에 4수한 맏아들,군입대한 둘째,서울대에 진학한 막내등 네부자가 7년간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쌓고 있어 화제다.

선친에 이어 2대째 제주도북제주군 추자도에서 별정직 우체국장으로 25년간 근무중인 김유성(金裕盛.53.제주시일도2동)씨가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90년.장남 지훈(志勳.26.제주대4)씨가 서울에서 재수생활을 하면서부터다.부모 곁에서 곱게 자란 아들이 갑작스런 객지생활에 낙담하거나 삐뚤어질까봐 편지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됐다.

4년간 보낸 편지는 2백여통에 이르렀고 지훈씨도 매달 한 두통씩 50여통의 답장을 보냈다.지훈씨가 처음 뜻했던 대학 진학에는 실패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지금의 대학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金씨는“애비 편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관한 마음이 큰몫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입대한 둘째 승훈(昇勳.22.제주대 휴학)씨에게 보내는 편지는 휴대폰.삐삐를 들고 입영하는 신세대 병영 속에서 단연 화제다.한주일동안 신문에서 스크랩한 이야깃거리가 짤막한 논평과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최근엔 누드모델 이승희에 대한 편지로 내무반은 웃음바다가 됐다.

“이승희 누드는 야릇한 감상 이전에 우선 건강하다.우리 승훈이도 군생활 속에서 이승희처럼 멋지고 건강한 몸매를 가꿔 여성들의 눈길을 한번 끌어보려무나….” 승훈씨도 한달에 두통씩 꼭 답장을 보낸다.

“오늘 아버지 편지가 동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습니다.'너의 아버지 정말 센스있으시다'고 칭찬이 자자했어요.” 승훈씨는 아버지 편지를 가장 소중한 보물로 여기고 모았다가 3개월마다 집으로 되보내 보관하고 있다.자신도 자녀가 생기면 편지를 쓸 생각이다.

“부권 상실이니,고개숙인 아버지니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자식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되돌아봅니다.편지를 쓰면서 저도 삶을 반성하고 아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더군요.” 추자도 태생인 그는 당시로선 섬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학(한양대 영문과)한후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다 수산업을 하던 선친의 편지부름을 받고 73년 낙향,우체국 일을 이어받았다.그는 두툼한 수첩 중간에 항상 우표 10여장과 편지지를 접어 넣어 갖고 다닌다.아들들에게 도움될만한 글귀가 보이거나 하고픈 말이 문득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편지를 쓰기 위해서다.올해 서울대에 진학한 막내 희훈(熙勳.19.사회복지1)군이 최근 목소리를 높이며 대들어 화를 냈던 金씨는 TV를 보다 귀가 솔깃,또 펜을 들었다.

“네가 지난번 대든 것이 속상했지만 지금은 기쁘다.TV에서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자녀들이 대드는 것은 그만큼 성장한 증거입니다.화보다는 아이를 인정해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고 말하더구나.희훈이도 어른이 돼간다는 생각이 들었다.다음에는 네 말을 귀담아 듣겠다….” 추자도=김태진 기자

<사진설명>

7년간 아들 3형제와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눠온 제주 추자도 우체국장 김유성씨가 큰아들 지훈씨와 휴가나온 둘째아들 승훈씨와 함께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꺼내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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