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스토리>일본경영체질 달라졌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스캔들을 일으킨 일본기업들의 경영진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있다.문제가 생겨도 서로 감싸주기,자리 나눠먹기를 해온 일본식 경영풍토에서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총회꾼에게 부정대출해준 사실이 적발된 다이이치간쿄(第一勸業)은행은 최근 회장.은행장.부행장.전무등 전무이상 경영진 13명 전원을 한꺼번에 퇴임시켰다.새 은행장은 54세의 스기타 가쓰유키(杉田力之)상무가 발탁됐다.이번 조치는 스캔들이 터진 다음인 지난달 인사에서 회장.은행장을 상담역으로 물러앉히고 구(舊)다이이치은행 출신과 구 간쿄은행 출신 두명의 부행장을 각각 회장과 은행장으로 승진시킨'시늉내기 문책.나눠먹기 인사'에 비난여론이 급등한데 따른 것이다.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총리는 개별기업의 인사를 이례적으로 언급,“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 체질을 바꿔야지 자리만 옮기면 다 되느냐”고 강하게 비난했다.

노무라증권도 지난4월 사장과 부사장.전무 전원을 포함한 15명의 최고경영진을 모두 퇴진시키고 상무중 최하위 서열에 국내영업경험이 전혀없는 우지이에 주이치(氏家純一.51)상무를 새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했다.

지난달 낙하산부대와 토착파(土着派)간의 파벌대립에 따른 인사분쟁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은 젠니쿠(全日空)는 취임 보름된 신임사장을 포함한 핵심경영층의 옷을 모두 벗겼다.

일본 기업들의 이런 인사쇄신은 불투명한 일본식 경영관행에 종지부를 찍고 투명성.책임경영.정보공개라는 국제기준(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해서는'구시대 인물의 대대적인 정리'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강도높은 숙청으로 전무이상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일이 잇따라 터짐에 따라 지금까지 전무급 이상이 참석해온'경영회의'대신'상무회'를 새로 구성해야될 정도다. 일본재계의 본산인 게이단롄(經團連)도 10일 노무라와 다이이치간쿄 두 회사에 대해 1년간 자격정지라는'금족령'을 내렸다.

그러나 외부의 시각은 여전히 싸늘하다.도쿄(東京)의 국제변호사들은“구미(歐美)의 경우 기업 자체를 파산시켜야할 중대한 사건”이라며 일본의 미지근한 조치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가령 영어로'기업 강도(强盜)'에 해당하는 총회꾼에게 기업이 부당이익을 제공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국에서였다면 60개 이상의 법률을 어긴 셈이 됐으리라고 지적한다.

미국 정부는 최근 스캔들을 일으킨 일본 회사에 대해 관련자료의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미국에 현지법인이나 지점을 개설한 이상 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미국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한보.삼미등과 관련된 한국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래서 미국이 일본과 한국의 스캔들 관련기업을 시범케이스로 삼아 미국내 영업등에 있어 부분적인 제재조치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금융빅뱅같은 제도개혁도 경영체질이 국제기준에 맞춰 개선되지 않는한 큰 의미가 없다는 경고인 셈이다. [도쿄=이철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