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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사람구경>1. 포르노만화가 신일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자기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는 소설가 구보씨가 남의 속을 들여다보고 만인 앞에 드러내 까발리는 소위 인터뷰를 거의 자발적으로 떠맡은데는 나름대로의 꿍꿍이속이 있었다.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그러지는 못하지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나가는 영화배우나 탤런트 혹은 모델 하나 정도는 걸려주겠지. 물론 여자,그것도 젊은,당연히 예쁜. 그녀와 적어도 서너시간,잘만 둘러대면 하루종일이라도 마주앉아 이야기하고 사진찍고 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명분이 하나 생긴다는 건 괜찮은 일이야.그러나 처음부터 성급하게 내 속을 보여서는 안된다.나의 임무는 이제부터 남의 속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감추자.천천히 드러내자.아니,끝끝내 내보이지 말자.감쪽같이 숨기자.이건 나만의 비밀이다.그리고는 시침 뚝 떼고 나의 속과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말그대로 그럴듯한 인물들을 먼저 만나기 시작하는 거다. 남들이 결코 나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신중하게,은밀하게 결정적인 그날을 기다리는 거다.거사의 그날까지 은인자중.그날 새벽까지,아니 정오가 지나도록,심지어는 날이 저물어가는데도 사람들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하고 헷갈리게.

구보씨는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그게 겉으로는 수줍고,속으로는 응큼한 구보씨의 삶의 전략이다.그래서인지 구보씨는 아직 자기가 살고 싶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지금도 남의 눈을 속이느라고.너무 수줍어서,너무 응큼해서.이러다가는 끝내 속을 드러내지 못하고 눈속임으로 살다가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떤 것이 구보씨의 진짜 삶인가.그가 드러낸 삶인가,아니면 그가 끝내 숨긴 삶인가.

왜 말머리에 허튼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가 하면 그건 바로 오늘이 첫날이기 때문이다.그리고 농담처럼 이야기한,어느 것이 진짜 속인지 모를 구보씨의 시커먼 속이 바로 이 ‘소설가 구보씨의 사람구경’의 게임 법칙이기 때문이다.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심판이 선수들을 불러놓고 해주는 경고의 이야기같은 그런 거 말이다.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었어도 할 수 없다.이제 게임을 시작할 시간이다.첫날이라 식전행사가 길어져 선수들이 매우 짜증을 내고 있다.

각하고,그리하여 구보씨가 구경하기로 작정한 첫 사람은 젊은 만화가다.예쁜 여자가 아니라 지저분한 남자다. 아직 유명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뭐 앞으로는 이현세나 허영만같은 대작가의 뒤를 이어 한국만화산업의 장래를 이끌고 갈 유망한 젊은 만화가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오히려 그 정반대다.잘 나가기는커녕 맨 밑바닥이다. 자기도 아는지 입을 벌릴 때마다 습관처럼 말한다.

“망하더라도 작가답게 망하겠다.”

예감이 좋지 않다.그런데 왜 구보씨는 그런 싹수없는 젊은이를 첫 상대로 골랐을까. 그가 구보씨의 깊은 속과 가장 먼 곳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구보씨는 무의식중에 첫 타이틀전의 상대로 한물간 필리핀복서를 선택하곤 했던 한국권투의 게임의 법칙을 흉내내고 있는 걸까? 알 길이 없다. 처음이 항상 어려운 법이야.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구보씨는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그러니까 겉마음과 속마음 틈에서 고민하다 결국 자신의 진실을 멀리 에둘러가기로 결정했다.

젊고 새로운 문화,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문화,다수문화가 아니라 소수문화,주류문화가 아니라 하위문화,뭐 그런 걸 대변할 만한 참신한 인물이 없을까.기존의 질서를 유지관리하는 격조있는 명망가가 아니라 풍속과 제도를 파괴하며 새로운 혁명을 꿈꾸는 문화의 전복자.헝그리 복서,스트리트 파이터,하이에나가 아니라 킬리만자로의 표범, 뭐 그런 거.그래야 뭐 새로운 걸 한다는 느낌이 들거 아냐.

그래서 찾아낸 인물이 바로 신일섭이란 이름의 나쁜 만화가였던 것이다.구보씨가 그에 관해 처음 입수했던 정보는 그가 올 봄 ‘히스테리’라는 희한한 이름의 소위 ‘대안적 실험주의 대중만화잡지’를 창간해 한국만화계를 발칵 뒤집어놨다는 것이었고,가장 최근 입수된 정보는 그가 어느 갤러리에서 전시한 일종의 포르노애니메이션을 보고 역시 나쁜 영화를 만들고 있는 나쁜 영화감독 장선우가 요즘 만들고 있는 ‘나쁜 영화’에 나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했다는 거였다.

구보씨는 일단 ‘히스테리’ 창간호와 2호를 입수했다.창간호에는 ‘선생을 죽여라’‘나의 표절문화답사기’와 같은 살벌한 폭력만화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일종의 마니페스토(포고령)가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류를 벗어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주류를 벗어나는 것은 바로 소외로 이어졌다.소외는 단지 소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주류에 의한 횡포로 소수를 죽이는 집단적 히스테리로 이어진다.”

아,그래서 제호가 히스테리구나.구보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2호를 본다.2호는 ‘대한민국 만화계의 화두’라는 부제를 붙여 ‘표절’을 대문짝만하게 다루고 있다.2호에는 3호에 대한 예고광고가 실려있는데,3호의 특집주제는 ‘포르노따먹기’다.구보씨는 뭔가 감을 잡았고,나쁜 저질 포르노 무명만화가 신일섭을 만났다.

구보:당신은 소위 한국만화계를 표절이라는 문제로 비판하고 포르노적 상상력으로 전복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는 것같다.만화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몸짓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내가 우리가 표현하는 모든 것이 만화다.

구보:나도 한때는 세상의 모든 책과 영화가 만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좋다.그런데 왜 당신은 그런 다양한 표현을 모두 포르노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총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람:포르노는 재미있고,표현의 가능성이 많다. 그것만 생각하면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떠오른다.

구보:섹스에는 그토록 관대하면서 왜 표절에는 그토록 단호한가.사람:만화는 예술이다.표절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작가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범죄행위다.

구보:외설은 범죄가 아닌가? 당신은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진보적인듯 한데,어느 부분에서는 매우 보수적이다.

사람:보면 알겠지만,나의 포르노는 외설적이지 않다.

구보:뭐가 외설이고 뭐는 외설이 아닌가?사람:나의 포르노는 성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충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말이다.보면 안다.

구보:꾸준히 할 생각인가?사람:이번'나쁜 영화'를 계기로 일로매진할 계획이다.일단 캠코더로 만들어 청계천에서 팔아보고,나중에는 유호나 한지일을 능가하는 포르노 제작자가 될 것이다.

구보:법적인 문제가 있을 텐데.사람:잡혀가도 하겠다.나는 장정일처럼,장선우처럼 비겁하지 않다.

구보씨는 그에게 두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받아들고 집으로 와 혼자 봤다.'빨강 극장'이란 애니메이션포르노와 포르노록을 비롯한 여러 퍼포먼스를 담아놓은 테이프였는데,구보씨 눈에 확 뜨이는 장면은 그가 복사기와 일장기를 동원해 태극기를 뒤덮어버리는 일본만화표절비판 퍼포먼스였다.

이상하지? 왜 한국의 포르노는 민족주의와 친족관계가 되는 걸까.이승희가 국위선양을 했다는 발상으로 말이야.뭐가 진보고 뭐가 보수인지 모르겠어.

<신일섭, 그의 삶>

▶70년생▶88년 주간만화 카투니스트로 데뷔▶89년 만화왕국·국민일보 카툰 입선▶95년 만화실험 ‘봄’ 창간, 설치만화 이미지 카페 순례전, ‘보물섬’‘보이스클럽’ 연재▶96년 청년 실험전 ‘개발금지구역’ 초대전▶97년 ‘올터너티브 드로잉전’ 초대,‘히스테리’ 창간,펑크록 그룹 ‘허벅지 밴드’와 포르노와 시 퍼포먼스 참여▶98년 개최예정으로 ‘국제 언더그라운드 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기획중

<필자 주인석>

63년생, 서울대 국문과졸업, 95년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연작소설 발표, ‘상상’‘이매진’편집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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