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벌>21. 노로돔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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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75) 국왕.그는 현대 캄보디아의'살아있는 역사'다.프랑스 식민지,군사 쿠데타,크메르 루주의 대학살정치,베트남의 침공,내전등 그야말로 피눈물나는 캄보디아의 현대사 속에서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지난 93년 캄보디아가 입헌군주제로 돌아선뒤 다시 왕위에 오른 그는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의 왕들과 달리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그는 군최고통수권.각료임명동의권.비상사태선포권등을 가진 왕으로서 현재 캄보디아 연립정권을 유지시키는 구심점이다.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는 41년 모니본 국왕이 서거하자 시아누크의 아버지인 스라말릭드를 제치고 19세 청년이던 시아누크를 왕으로 앉혔다.53년 독립을 얻어낸 그는 이후 캄보디아를 공화제로 바꾸고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불교국가로 키워 나갔다.

그러나 70년 론놀 장군이 주도한 우익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캄보디아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시아누크의 고행은 시작됐다.쿠데타를 피해 망명길에 올랐던 그는 75년 크메르 루주 정권이 들어서면서 잠시 국가주석직에 복귀했다.그러나 곧 크메르 루주측은 시아누크를 가택연금했고 이후 79년까지 대학살 공포정치를 폈다.

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수도 프놈펜에 친베트남 정권을 세우자 그는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그는 이후 91년 프놈펜으로 돌아올때까지 13년동안 외국에서 반(反)베트남 활동을 해왔다.

90년 9월 베트남군은 마침내 캄보디아에서 철수했고 91년 10월에는 캄보디아 정권을 다투는 각 계파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유엔 주도아래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때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최고민족회의 의장으로 선출됐고 정권을 놓고 다투는 여러 정파를 아우르기 위한 상징적 인물로 다시 정권의 정점에 올랐다.

93년 총선 결과 그의 아들인 라나리드가 이끄는 캄보디아민족연합전선이 제1당으로 부상하자 그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바꿔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망명시절 북한과 중국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특히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30년 우정을 쌓았던 그는 96년 한국과의 수교를 반대하면서“친한파(親韓派)는 내가 죽을때까지 한국과의 국교 수립을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바 있다.

시아누크는 지금까지 6명의 부인으로부터 14명의 자식을 얻었다.이중 6명은 70년대말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 당시 사망했다.현재 살아있는 8명중 아들이 5명,딸이 3명이다.

살아있는 아들중 첫째는 유바니스.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는 94년 귀국,아버지의 명을 받아 캄보디아 최대의 불교사원 건립에 관계했다.

유바니스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들 차크라퐁은 이복형제인 라나리드 현총리와 특히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그는 91년 훈 센 총리 밑으로 들어가 부총리를 지냈다.그러다 93년 총선 결과에 불만을 품고 분리독립을 주장한바 있으며 94년에는 불발 쿠데타를 기도한 이후 현재 프랑스에 망명중이다.

현재 시아누크의 아들중 정치적으로 가장 큰 인물은 라나리드 현 제1총리다.

프랑스에서 정치학교수를 지낸 그는 83년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정치일선에서 활동해 왔다.

다음으로 시아누크의 현재 부인인 모니크 왕비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이 있다.이중 시아모니는 프랑스 파리에서 발레 교사를 하다 지금은 유네스코(UNESCO)의 캄보디아대사로 나가 있다.시아누크는 지난해 봄부터 심각한 합병증에 시달려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상황이다.여러 정파간의 아슬아슬한 연정을 지켜가게 하는 구심점인 시아누크 사후 캄보디아가 왕위 계승 문제를 비롯,아직 무기를 놓지않고 있는 크메르 루주및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재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김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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