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헌법 존중하는 법치로 민주화 2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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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사활이 걸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연말연초에 걸쳐 국민의 눈앞에서 벌어진 의회정치의 파탄은 모든 국민에게 분노를 넘어 심한 배신감에 휩싸이게 하였다. 설사 오늘의 경제위기를 어렵사리 넘긴다 하더라도 지금의 정치 형태로는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선진 민주국가로의 도약을 기대하기 어려운 전망이다. 선진국들이 경제위기가 정치위기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권이 경제위기 극복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우리는 오히려 경제위기를 사회위기로, 나아가 정치위기로 연계시키는 답답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듯 병들어 가는 우리의 민주정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

교과서로, 즉 정론(正論)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상황이나 여건을 예외적이라고 주장하는 역설의 악습에서 벗어나야만 된다. 우리가 20년 전 87년 체제의 출범으로 민주화 1기를 시작하였다면 바로 지금이 뒤늦게나마 민주화 2기로 넘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민주화 1기가 부정선거, 장기 집권, 헌법 유린 등 독재나 권위주의 체제의 극복으로 시작했다면 민주화 2기는 인치(人治)보다 법치(法治)를 앞세우는 헌법 중심의 민주정치를 정착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번 여야 격돌의 초점이 된 법안들에 대한 각 당의 입장은 각기 나름대로의 명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의회정치 파탄의 이유는 그러한 입장과 명분의 차이보다도 그 차이의 조정 또는 선택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민주적 절차의 부재에 있다.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절차의 부재나 미비가 방치됐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진보 및 보수 정당이 지닌 후진성의 체질화였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권위주의 체제를 극복한 민주화운동의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컸다는 도덕적 우위를 앞세워 투쟁의 열기에만 집착한 나머지 민주화 이후에 민주정치를 위한 국민정당을 형성하는 데 있어 그 한계를 노출하는 아이러니에 부딪히고 말았다. 더욱이 진보세력은 10년을 집권하면서도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처럼 중산층을 포함한 다수의 국민이 안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국민정당으로 발전되지 못한 채 소수파의 불안심리에 얽매어 야성(野性)과 투쟁으로 일관하는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집권정당으로서도 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의 형평과 복지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증대시켜 갈 것인지를 국민에게 제시하지 못하다가 다시 야당의 위치로 돌아와서는 우선 손쉬운 야성 회복에 매사를 의존하려는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한편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지금의 여당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책정당이나 국민정당이 되기엔 너무나 갈 길이 멀고 무력한 모습으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 보수여당은 권위주의시대의 유산과도 일부 연계돼 있다는 명분상의 한계와 산업화의 주역을 맡았었다는 이점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보수여당 역시 산업화에 공헌한 기업과 시장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도 새마을운동 등으로 상징되던 함께 잘살아보자는 시민사회로의 보편화 전략은 실종시킨 채 국민정당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이 ‘친이’ ‘친박’ 등 전근대적 파당정치의 양태는 많은 국민을 역겹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정당정치의 파탄 속에서 세기적 경제위기를 맞은 지금 더 이상 지난 20년을 끌어온 민주화 1기의 지지부진한 정치 과정을 답습해야 할 이유는 없다. 민주화 2기로 넘어가는 정치개혁으로 규칙도 심판도 없는 축구시합 같은 정치 혼전에 종지부를 찍고 헌법을 존중하는 법치로 인치를 대치해야만 한다. 여야 충돌이 휴전상태로 접어든 이제부터 다수결의 원칙과 여야합의의 원칙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에 대한 헌법적 논의가 시작되고 민주정치의 원활한 운영규칙을 보완할 수 있도록 헌법특위를 하루속히 출범시켜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소수의 비토 파워, 즉 거부권의 인정은 좌나 우의 소수세력에 의한 민주정치의 마비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정치권과 국민이 함께 되새겨야만 할 것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조속히 민주정치의 틀과 규칙을 정비할 때 경제위기와 정치위기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