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옥중 에세이집 '새벽에 길어올린 한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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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창살 너머 산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새벽 여명이 밝아오면/쓰러져 누운 몸을 흔들어 벽 앞에 일으켜 세웁니다./아랫배가 먼저 깨어나 팽팽한 시위를 당기면 생각은 과녁을 향해 집중합니다./고요히 마음을 살피고 내 몸 속에 들어앉아 계신 하늘을 새로이 모셔옵니다./새벽에는 하늘이 가르치시는 공부를 합니다./녹슬지 않는 정신,쓰면 쓸수록 빛나는 정신은 무진장하고 광대합니다.” 숨어다니며'얼굴 없는 시인'으로 80년대를 풍미했던 노동자시인 박노해(39.사진)씨가 옥중 명상에세이집 '새벽에 길어올린 한 생각'을 내달초 해냄출판사에서 펴낸다.84년 시집'노동의 새벽'을 내며 진보시단은 물론 노동운동권의 핵으로 떠오르던 박씨는 92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결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주교도소에 수감중이다.

형 박기호신부와 부인 김진주씨가 면회를 다니며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산문시 형식의 짧은 에세이 60편 정도로 옮겼다.

위에 인용된'어떻게 사느냐고 물으시면'첫 부분에도 드러나듯 수감 생활의 심경,특히 참 나를 들여다보며 인간과 사회,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어'한 혁명주의자의 심경의 변모'가 주목된다.

“불의한 권력을 향해 몸바쳐 피흘리며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이면 그만인줄 알았는데,/그도 소중하지만 이 시대의 진정한 혁명이란 먼저 나 자신이 바로 사는 일임을/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내 한 몸 먹고 쓰고 일하고 노는 일상 생활이 60억 인류 앞에 떳떳하고 모범이 되지 않으면/좋은 세상이란 앙상한 뼈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아니 오히려 진보의 이름으로 좋은 세상을 가리고 마는 것임을/이제사 깨우치고 가슴을 칩니다.”'야심'이란 글에서 박씨는 자신의 과오를 깨우치고 있다.그러면서 자신의 야심은'노인들과 젊은이와 아이들이 어울려 사는 시골 어느 동네에서 연봉으로 쌀 몇가마 받는 이장 노릇'이라 소박하게 밝히고 있다.

옥중에 있으면서 요즘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비판의 날도 시퍼렇다.

“온통 부패투성이 세상이여 썩어라,더 팍팍 썩어라.구석구석까지 썩어라./기왕 썩는 것,돈과 힘의 심장부까지 썩을 대로 썩어라.//푹푹 썩어야 푸르른 내일의 훈김이 모락모락 오르지./속속들이 잘 썩어야 순정한 새날이 오지.” 현 사회 풍조에 대한 단순한 비판.풍자로 보기에는'순정한 새날'을 향한 혁명의 혼이 눈을 크게 뜨고 있다.박씨는 현실적 삶과 생명의'아름다운 타협'을 말하면서 혁명주의자로서 세상을 향한 최초의 순정한 초발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초발심에서 생명을 위해 북녘동포를 돕자고 호소하고 있다.

“나 비록 갇힌 몸이어도 다시 살아올 내일을 바라보며 충만한 은총에 감사하는 나날이었건만,/이토록 사무치게 내 빈손을 슬퍼하고 미워한 적 없건마는,/바로 지척에서 굶주려 쓰러지는 동포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나에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어떤 사진 한장을 보고 말았다'중)며 박씨는 그의 빈 손에 에세이집 선(先)인세로 1천만원이 들어가자 모두 북녘동포돕기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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